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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Apr 10. 2018

한국 역사 강연도 문화상품

2017년 12월 16일

리투아니아의 한국 교민사회는 매우 작다. 그래도 리투아니아의 한류팬 학생 모임과 연계하여 크고 작은 행사를 연다. 교민사회는 빌뉴스에서 1990년대부터 제일 오래 살고 계신 강 스데반 선교사님 가정을 중심으로 작게나마 한인회가 조직되어 있다. 리투아니아 학생들의 한류 모임은 빌뉴스에 '한울(Hanul)'이라는 클럽이 있다. 카우나스 VMU의 '한류(Hallyu)' 클럽은 VMU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는데, '한울'은 일반에게 열린 모임이다. 정기적인 행사가 있거나 체계적인 조직이 있는 것은 아니고, '한국-리투아니아 수교 25주년'이었던 2016년 봄에 시청사 광장에서 큰 행사를 한 적이 있고, 한국에서 공연단이 방문하는 기회가 있으면 거기에 맞추어 한류팬들의 무대나 한국음식 체험을 계획해서 행사를 한다. 여기에는 재외동포재단의 교민사회 지원이나 대사관, 문화원의 지원이 밑거름 겸 촉진제 역할을 한다.

해마다 6월에 열리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코리아 페스티벌. 리투아니아에서 이런 대규모 행사는 아직 불가능하다.

연말을 맞아 한인회와 빌뉴스의 한울 클럽이 주축이 되어 작은 문화행사를 열었다. 큰 행사는 아니었지만, 별 행사 없이 한 해를 보내기는 아쉬운 마음에 다소 급하게 준비가 되었다. 빌뉴스 세종학당이 위치하고 있는 미콜라스 로메리스 대학(Mykolas Romeris University)의 강당을 빌려 몇 가지 공연을 하고 한국 음식으로 마무리하는 행사였다. 외부에서 공연팀이 오는 것도 아니었고 조촐한 연말 행사였으므로 순서가 많지는 않았지만, 다 아는 얼굴들이 모여 장기자랑처럼 하는 공연이 오히려 지역 내 연말 문화행사로는 더 즐겁기도 했다. 강 선교사님이 동아리를 만드셔서 연습한 사물놀이 팀을 시작으로 리투아니아 학생들과 한국 교환학생들의 K-pop 댄스, 한국 교환학생의 가야금 연주도 있었고, 한국인 아빠를 둔 리투아니아 여학생의 한국 가요 가창 순서도 있었다.

여기서 강 선교사님의 부탁으로 한국의 역사에 대한 강연을 하게 되었다. 먼저 문화 공연들을 다 하고 나서 로비에서 음식을 나누기 전, 약 한 시간 동안 '한국의 역사'를 주제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학교 밖에서 강의를 해본 적이 거의 없는 데다, 중고등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한국 문화를 즐기러 모인 행사에서 어떻게 강연을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처음에는 망설였다. 그래도 한국 역사를 제대로 들을 기회가 거의 없다는 말씀에 흔쾌히 하겠다고 답을 했다. 내용이 고민이 되었다. 만담 하듯 농담을 섞는 강연에는 전혀 소질이 없고, 다만 어려운 내용을 쉽게 설명하는 정도로 할 수 있었다. 최대한 간단하고 쉽게 한국사를 쭉 훑기로 하고 사진과 그림 위주로 PPT를 만들었다. 그래도 단군 이야기를 시작으로 일제시대 정도까지 언급이라도 하기에 한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 같았다.


즐거운 한류 공연에 이어 브레이크 댄스까지 선보인 사회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소개를 해 주고 강연에 나섰다. 부채꼴 강당이라 내려다보는 청중이 전부 올려다 보이는데, 대부분 중고등학생이고 강연보다는 뒤에 먹을 한식을 기대하는 게 너무 당연했다. 아마도 음식의 힘이었겠지만, 한 시간 동안 고조선부터 삼국, 고려, 조선, 일제시대까지 내려가는 강연을 신기하게도 조는 사람 하나 없이 귀담아듣고 있었다. 간결하게 한다고는 했지만 중요한 인물과 사건, 국제관계에 대한 설명을 버리지 못한 집착 때문에 한 시간을 다소 넘겼다. 배가 고플 게 분명한데, 일제시대를 후다닥 끝내고 마치면서 예의상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뜻밖에도 여기저기서 질문이 이어졌다. 현대까지 다루지 않고 끝냈기 때문에 그 후의 한반도 현대사와 지금의 한국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한울 클럽 리더 청년은 브레이크 댄스팀 리더이기도 했다.

여러 질문 중에 "한국 사람들이 지금도 일본을 싫어하는 게 정말인가요? 왜 그런가요?"라는 질문도 역시나 등장했다. 일본에 대한 인상이 아주 좋은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식민지 한국의 아픈 기억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착하고 친절한 일본은 지금도 평화적인 국가이니 북한과 중국, 러시아를 함께 상대하는 한국과 일본은 당연히 더없이 좋은 친구 관계여야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미 수업 시간에 몇 번 받은 질문이기에 같은 대답을 한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러시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나요?" 밥이 밖에서 기다리는 상황에서 설명을 단축하기에 더없이 좋은 대답이다.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지배는 끔찍하기 짝이 없는 기억이기 때문이다. 모든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아하~'하는 반응을 한다. 물론 현대 리투아니아와 러시아의 관계는 조금만 들여다보면 한일관계와 매우 다르다.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식민지배의 과거가 있고,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가진 채 지금을 위한 관계를 경영해야 한다는 점에서 감정적인 부분은 꽤 비슷하다.

한국 교환학생의 가야금 연주와 한국인 아빠를 둔 리투아니아 학생의 한국 가요 열창

어서 밥을 먹자며 강연을 마치고 나도 함께 오랜만에 한식을 먹으며 여러 사람과 이야기를 했다. 많은 학생들이 재미있게 들었다며 추가 질문을 하기도 했다. 빌뉴스에는 대학에서도 한국학 관련 수업을 하는 곳이 없다. 한국어 강좌만 있을 뿐이다. 한류 팬들과 동아시아에 호기심이 많은 학생들도 한국 관련 내용을 강연으로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의외였고, 안타깝고, 미흡했던 강연이 미안하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청중 중에 한국인 어머님들 같은 분들이 있어서 인사를 했는데 고려인이라고 하셨다. 발트 지역에 고려인 인구가 꽤 된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당연히 몇 세대가 지났으므로 한국어는 전혀 안 하시고 러시아어, 리투아니아어, 영어를 하셨다. 세 분이 오셨는데 한국 역사를 제대로 들어본 경험이 처음이라며 너무 좋았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칭찬으로 배가 불렀다. 사실 음식은 거의 먹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이 너무 열심히 먹어서 순식간에 동이 나고 강 선교사님 사모님이 좀 늦게 내놓으신 약식을 겨우 얻어먹을 수 있었다.

강 선교사님 집 앞 겨울 - 집에서도 행사를 종종 하셨다고 한다.

재미있게 웃으며 들을 강연도 아니었고 영어로 하느라 표현이 자유롭지도 않았으며 괜한 고집 때문에 분량을 많이 줄이지 못해서 시간을 넘겼다. 그런데도 다들 좋았다고 반응해주니 다행이면서도 놀라웠다. 언제나 흥겹고 즐거운 에너지가 넘치는 한류 대중문화가 아니어도, 고리타분한 역사나 정치, 사회적인 내용도 충분히 '문화상품'이 될 수 있겠다고 느꼈다. 물론 한류 열풍 덕분에 한국에 대한 기본적인 관심이 올라갔기에 수요가 생긴 문화상품이다. 테드(TED)나 다른 강연 동영상 프로그램도 있듯이 강연도 소비하는 시대다. 한류로 한국을 접한 잠재 고객들이 보다 '지속 가능한' 고객이 되도록 하려면 좀 집중력을 요하는 이런 문화상품도 잘 공급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결코 양질의 상품이 아니었던 내 일회성 역사 강연이 이렇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은 이유는 공급이 너무 없어서 희소가치가 생겼던 탓이다. 개인적으로는 참 감사하지만, 이런 공급이 좀 더 적극적으로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빌뉴스 시가지의 조용한 연말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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