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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13. 2018

리투아니아에서 만난 중국과 대만

2017년 9월 30일

VMU 아시아센터 주관의 가을 국제 콘퍼런스 준비로 바쁜 리나스 교수가 일정을 정리해서 보내주었다. 가을마다 개최하는 동아시아 관련 국제학술회의의 주요 후원기관은 일본의 국제교류재단(Japan Foundation)과 라트비아에 주재하고 있는 대만대표부이다. 대만의 재정적 도움과 비중도 꽤 커서 아시아센터 산하에 대만연구센터도 있고, 가을의 이 국제회의에는 대만대표부에서 중견급 공무원이 참석하기도 한다. 즉, 이 국제회의에서 중화권 대표는 대만이다. 한데 이번 회의 일정을 보니 첫날 일본, 한국, 대만의 시민사회 관련 세션들이 있고, 이튿날 오전에 중국의 시민사회 세션을 하는 이틀짜리 세미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작년에는 중국 관련 세션은 없었다. 올해도 중국에서 직접 오는 참가자는 없었지만 유럽 내 대학에 있는 중국 전문가들로 중국 세션이 구성이 되어 있었다. 같은 날에 하지 않고 다음 날 따로 하긴 하지만, 대만 대표부가 후원하는 행사에 중국 국적자가 참석하는 중국 관련 세션이 있다니, 이 정도 겹치는 건 괜찮은가 싶었다.

이번 가을 학술회의는 각국 '시민사회'를 주제로 동아시아 각국별로 세션을 가졌다.

'하나의 중국' 원칙이 확고한 중국은 리투아니아에도 대사관이 있다. 대만은 라트비아에 대표부가 있지만 존재감을 넓히는 활동에 아주 열심이라 리투아니아에서 열리는 행사에도 자주 참석한다. 그 중국과 대만을 한 자리에 모아놓는 행사는 최대한 피해야 할 모험이다. 봄 학기 중간 즈음에 개최하는 학생들 축제인 '아시안 위크(Asian Week)'에는 일본대사관과 함께 중국대사관이 후원을 한다. 카우나스로서는 꽤 큰 아시아 관련 문화행사이기에 일본대사와 중국대사가 개회식에 참석하고 인사말을 한다. 지난 3월에는 폴란드의 한국대사도 오셔서 동아시아 주요 3국 대사가 모두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럴 때는 결코 대만 대표부를 초청하지 않는다. 대사급이 참석하면 뭔가 인사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같이 인사말을 해도 되는지, 누가 먼저 인사말을 할지 등등 사사건건 난해한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한중일 대사 3인의 인사말 순서만 해도 예민한 문제여서 '영문 정식 국가 명칭의 알파벳 순서를 따른다'는 설명을 여러 차례 했던 기억이 난다. 

봄 행사인 아시안 위크 개회식에 참석한 한중일 3국 대사님들 / 아시안 위크는 각 학생클럽들의 연합행사다. 각국 대사관이 적극 후원한다. (사진 by Jonas Petronis)

대만대표부와 중국대사관의 공무원들을 가급적 같은 행사에 겹쳐 초청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라는 게 아시아센터 교수진들의 설명이다. 장학금이나 행사 등 중국과 대만으로부터 후원받는 부분이 둘 다 있으니 그 사이에서 조절이 쉽지 않다. 행사 때마다 언제 누구를 초청하고 어떻게 초청 여부와 사정을 '예의에 어긋나지 않도록' 설명하는지가 센터 교수진의 고민거리다.

딱 한 번, 도서관 행사 때 중국대사와 대만대표부가 모두 참석했던 기억이 있다. 인문대 도서관 한편에 구별된 공간을 확보해서 동아시아 각국 관련 책들을 따로 서가로 갖춘 '아시아 북스페이스(Asia Book Space)'의 개관 행사를 한 날이었다. 옛 일본영사관 건물에서 시작되었던 일본연구소 시절 소장 도서들을 기반으로 해서 대만과 중국에서 기증한 도서들, 한국의 국제교류재단과 몇몇 개인들이 기증한 도서들이 누적되어 꽤 여러 서가를 채운 공간이었다. 영어책이 많았지만 각 나라 언어로 된 책들도 꽤 있어서 글자들이 눈에 띄는데, 아무래도 일본어가 압도적으로 많다. 구별된 북스페이스를 꾸리고 도서를 늘려가겠다는 아시아센터의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여기에는 일본과 한국은 물론 중국과 대만까지 모두 후원을 했다. 그래서 어느 한 대사만 초청에서 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 행사는 지금까지 있었던 아시아센터 행사 중 전무후무하게 중국과 대만 외교관 모두가 참석한 행사가 되었다. 폴란드에 있는 한국대사관에서는 참석하지 않았기에 얼떨결에 내가 대신 한국국제교류재단 후원기관 명패 커버를 떼고 사진도 찍혔다. 그때는 다른 나라들은 대사급이 다 있는데 한국만 없어서 아쉽기만 했었다. 돌이켜보니 중국과 대만이 동시에 존재했던 건 너무나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중에 아시아센터 센터장이었던 아우렐리우스 교수들에게 그 날은 웬일로 중국과 대만 대사급이 다 왔었더라고 슬쩍 물어보았다. 역시나 그때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해 하소연이 쏟아졌다. 모두에게 초청장을 보냈고, 다른 때 같으면 중국대사관이나 대만대표부에서 사전에 연락이 와서 상대방도 초청했는지, 참석하는지 등을 확인하고 가급적 어느 한쪽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불참'하도록 순탄한 해결을 끌어냈을 것이다. 한데 이번에는 모두가 흔쾌히 참석을 통보하는 바람에, 엄청나게 조심하면서 사전 조율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대사급의 참석은 해당 국가의 존재감을 알리고 위상을 높이는 일이 되어야 한다. 당연히 축사도 하고 같이 사진도 찍어야 한다. 수십수백 통의 전화와 이메일을 통해 조율한 끝에, 결국 그 어떤 나라의 대사도 축사를 하지 않고, 같이 찍는 기념사진도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일본대사마저 축사를 못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일본대사관에도 숱하게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어쩐지, 후원 명패 개봉할 때만 개별 사진을 찍었을 뿐, 단체로 뭘 남기는 순서가 없었다. 리투아니아도 작은 모임에서조차 개회사, 축사, 답사 등등 꽤나 여러 사람 말을 시키는 순서를 만드는 게 보통이다. 이 개막식 행사는 학교 측의 축사와 도서관 소개만 있고 후원한 동아시아 각국 대사님들은 그저 다 앉아만 있었다. 시간도 짧게 끝났고, 리셉션도 별 축하인사 없이 후다닥 끝나버렸다.

아시아 북스페이스 개관행사에 참석한 중국, 대만, 일본 공관 대표들. 공식 발언 없이 작은 명패 제막만 했다.


지나고 나서 이야기하면서 웃기는 했지만, 이런 먼 나라 리투아니아에서조차 중국 대만 문제는 첨예하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그 도서관 행사에서 결국 제일 신났던 사람은 나였던 것이었다. 조그만 명패에서 조그만 린넨 천 떼어내는 거였을지언정 대사님들 사이에서 제막식도 해보고, 한국국제교류재단 대표로 참석해줘서 고맙다는 감사의 말도 듣고, 각국 외교관들과 인사도 나누며 그저 즐기고 있었다. 그 두 중화권 대사급 참석을 문제없이 넘기느라 진땀 빼는 리투아니아 동료들 사정은 미처 모른 채, 한국어 도서가 그래도 많이 늘었다며 뿌듯해하면서 한국 존재감을 티 내려고 떠들고 있었다. 그 후로 다시 아시아센터 행사에서 그런 난감한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때 상황을 폴란드 주재 한국대사관 분들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런 경우라면 한국 대사나 외교관이 참석을 하는 것도 조심스러워진다고 한다. 자칫 중국과의 관계를 저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만이 공식적으로 나서거나 대만 정부 측 인사가 참석하는 행사는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을 국제 콘퍼런스는 외교 공관에서 오지 않고, 학자들만 모여서 편안한 분위기로 하게 되었다. 다행이지만, 이런 문제로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의 대학 내 연구소까지 고생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아시아 북스페이스 정면 첫 서가의 절반은 육중한 중국어 전집 세트가, 나머지 절반은 일본어 만화책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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