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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12. 2018

학생들과의 리투아니아 이야기

2017년 9월 29일

첫 학기 수업은 학부 수업 하나, 대학원 수업 하나였다. 학부 수업은 거의 70명 가까이 수강하는 기본적인 한국 역사 수업이었는데 수강생이 너무 많다 보니 대화식 수업은 고사하고 짧은 질의응답도 쉽지가 않았다. 대학원 수업은 '1945년 이후의 정치와 사회' 수업이었는데 6명으로 단출했다. 리투아니아와 비교해가며 이것저것 이야기를 해볼 수가 있었다. 학기 시작하고 한 달쯤 지나 어느 정도 서로 익숙해진 후, 수업시간에 리투아니아의 면면들에 대해 학생들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마침 한국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를 다루면서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 영문판을 함께 읽고 토론한 참이었다. 소설 내용 중에 자살한 여자를 발견하는 장면이 나온다. 리투아니아의 자살률이 세계 최고를 구가하는 이유가 궁금하다고 했더니, 학생들답게 전문적이지는 않아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나온다. 빈부격차와 사회복지가 여기도 역시 이슈이다. 카우나스 자유로를 걷다 보면 카페를 오가며 한가롭고 편안해 보이는 젊은 학생들이 있는 반면, 중년 이상의 행인들 중에는 표정과 옷차림에서 삶의 고단함이 드러나는 경우도 많이 있다. 일자리가 많지 않고 임금이 낮은 점이 청장년층의 만성화된 문제이고 불만이다. 노인이 되면 연금 제도는 잘 되어 있는 편이지만 딱히 할 것도, 즐길 것도,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없어진다. 거리에서 노인들의 모습이 잘 안 보이고 소외되어 있는 점도 문제라고 한다. 

특이한 점은 어린 학생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10대들의 자살률이 최근에 특히 높아 문제가 된다며, 주로 학생들 사이의 괴롭힘이 원인이라고 추측을 한단다. 한국 같은 입시지옥도 아닌데 아이들이 서로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괴롭히는 요인은 또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약자를 구분해 내고 괴롭히는 것도 어떤 출구를 찾는 행위라면, 어린 학생들이 그런 압박을 받는 이곳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학생들의 문제라면 과도한 입시경쟁만 생각하는 한국인의 시각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른들이 느끼는 문제와 압박은 어린이들에게도 전달되게 마련이니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다. 


사회진출을 앞둔 학생들의 화두 중 하나는 낮은 임금이다. 임금 인상이 되고는 있지만, 몇 년 전부터 유로화를 사용하면서 빨라진 인플레이션을 따라잡지 못한다. 체감하는 임금이 너무 낮다는 것이다. 소득이 실질적으로 하락하고 서유럽에 비해 낮은 게 분명한 구조다. 자연히 모든 젊은이들의 고국 탈출을 촉진하고 있다. 리투아니아를 떠나 서유럽 국가(특히 영국이나 독일)로 나간다고 해서 꼭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국내에서 보수 낮은 일자리에 만족하고 있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가상승이 피부로 느껴지다 보니 유로존 가입에 대한 불만이 높다. 유로존에 가입하면서 인프라 개발 등 큰 사업에 EU의 지원도 많이 받고 투자유치도 쉬워졌을 게 분명하지만, 서민들에게는 물가상승이 가장 큰 불만이 된다. 서울에서 온 나로서는 여기 물가가 아직 참 싸게 느껴진다. 식당에서 사 먹어도 부담이 없고, 장바구니 물가는 서울에 비하면 격차가 나서 눈의 의심할 때도 있다. 자국 통화를 사용하는 폴란드는 더 싸다고 하지만, 같은 유로를 쓰는 서유럽에 비하면 여기도 많이 싼 편이다. 즉 앞으로도 물가는 오를 여지가 많다는 의미다. 임금이 파격적으로 오르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불만과 젊은 인력 유출은 막을 방도가 없을 것이다. 자살률과도 연결된 문제이다.

어떤 개인 날 빌뉴스 공원에 있던 체스판 탁자, 그 근처 성당에서 우연히 만난 어린 여학생들의 합창 공연. 여유롭고 예술성 넘쳐보이는 일상이지만 여기도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다.

자살률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학생들이 성토한 또 하나의 문제는 음주였다. 농담하듯 '소련이 가르쳐 놓은' 나쁜 습관이라고 책임을 전가하기도 하고, 러시아나 한국과 일인당 음주량으로 세계 최고를 놓고 경쟁한다면서 웃기도 한다. 음주는 정말 심각한 문제다. 한국도 술을 많이 먹으면서 자살률도 높으니 알코올 소비와 자살률이 연관은 있을 것이다. 우울증의 증상 중 하나가 자살이라면, 음주 역시 우울할 때 더 늘어나니 자살을 부추기는 영향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왜 우울하고, 왜 술을 많이 먹냐에 대한 답으로 학생들 중 상당수가 날씨 탓을 했다. 그 영향도 물론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남유럽을 제외하고 날씨가 아주 좋은 유럽 국가가 몇이나 되는지 생각해보면 리투아니아가 유난히 더 심하게 날씨 탓을 할 이유는 없지 않냐는 반론이 바로 나온다. 이런저런 요인들을 종합하면 대충 답을 할 수는 있다. 날씨 같은 자연적 요인, 체제 전환을 거치고 유럽에 편입되어 간다는 사회적 요인, 역사적 기억이 섞인 문화적 요인이 죄다 중첩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종합적인 분석은 좋기는 하지만, 뭔가 결정적 요인을 찾고 해결하고 싶은 질문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일 년에 두세 번 큰 장이 서는 축제가 있다. 장터 물가는 역시 저렴하다. 공예품부터 생필품, 식재료까지 망라한다.

처음 와서 한동안은 "여기는 날씨만 좋으면 그저 휴양지구나" 싶을 정도로 언제나 여유롭고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작은 나라 리투아니아도, 그 안의 작은 도시 카우나스도 사람 사는 곳에서 고민하게 되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이방인 체류자라서 한 걸음 떨어져 있다는 특권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할 뿐이다. 일상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한국보다 훨씬 적다는 것은 확실하다. 일본이나 한국을 공부했거나 가 본 모든 학생들이 동의한다. 그래도 사람은 자기가 처한 구조 속에서 상대적인 상황에 영향을 받는 것이니, 먼 나라 한국에서 48시간도 모자라 하며 정신력으로 버티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여기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카우나스 도심 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과 국가 영웅들. 지배와 저항의 역사가 일단락된 지 30년이 채 안 되었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느끼는 압박이나 박탈감은 한국과 다른 맥락에서 분명히 존재한다. 누적된 역사적 상처도 아직 많이 남아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소련 붕괴 후부터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국가를 자랑스러워하고, 국가가 국민들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국민들이 믿고 있다는 것이다. 소련 시절의 습관이 남아서 비효율적이고 관료적이라는 불만이 많지만, 그 존재 이유와 목표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는 있다. 반면에 앞으로 뭔가 획기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너무 없다는 문제가 공존하고 있다. 노력해도 잘 안된다는 의식이 팽배한 것이다. 나라가 독립을 해서 지속되는 것 자체는 참 기특한데, 앞으로 한국처럼 경제 강국이 되거나 유럽의 주도적인 국가가 되리라는 기대는 별로 없다. 한국처럼 독재를 하거나 파격적인 전략으로 독자 노선을 걷는 것은 유럽연합 회원국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소련으로부터 1990년에 독립을 하고, 2004년에 유럽 연합에, 2014년에 유로존에 가입할 때는 분명 강한 추진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지금도 노력을 하고 있다.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까지 3국이 함께 발트 지역 남북으로 인간띠를 잇고 노래하며 평화시위를 했던 저력이 있다. 독립한 지 30년 정도 된 이 시점이 중세 이래 가장 평화롭고 풍족한 시기일 듯하다. 무력감과 박탈감이 있어서 자살률, 음주율 세계 최고라는 오명을 쓰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상황이 획기적으로 나아질 가능성은 많지 않지만, 그렇다고 획기적으로 나빠질 가능성도 크지 않다는 점이 다행일 수도 있겠다. 인구 유출과 최근 높아지고 있는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이 큰 문제라고 하지만, 유럽 내로 유출되는 인구는 그만큼 쉽게 돌아온다는 믿음이 있고,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은 유럽 전체와 미국이 같이 대응해주리라는 믿음도 있다. 북한을 머리맡에 두고서 일상에서도 경쟁 때문에 정신이 없는 한국사람 입장에서 보기에는 부러운 생활이고 고민들이다.

군사박물관 내에 있는 전몰자 및 독립영웅들 추모공간 / 2월과 3월에 독립기념일이 연달아 있어서 국기 조형물이 많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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