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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Mar 10. 2018

카우나스와 빌뉴스, VMU와 VU

2017년 9월 9일

가을학기가 시작할 즈음 한국에서 반가운 손님이 오셨다. 박사과정 때 지도교수님이 마침 모교의 대외협력본부장을 맡으셔서 해외 대학들과 협력을 위한 출장이 있었다. 유럽 출장길에 리투아니아까지 일정을 잡으셨다. 오시는 김에 VMU와 학교 간 협력협정 논의를 해보시도록 자연스럽게 주선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VMU와 한국의 모교가 협력협정을 맺도록 거든 셈이 되었다. 겸사겸사, 카우나스 VMU 외에도 리투아니아의 서울대학교라 할 만한 빌뉴스대학교(Vilnius University, VU)와도 협력을 추진하게 되었다. 한국식 출장답게 길어야 이틀의 빠듯한 일정이었다. 오랜만에 한국식으로 미팅, 오찬, 만찬 등의 일정을 잡느라 분주했다. 지도교수님은 개인적으로는 더없이 편하지만, 본부장 타이틀을 달고 학교 대 학교로 방문하는 일정은 순식간에 공식적인 행사가 된다. 소위 '의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VMU도 한국과의 교류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는 데다 한국에서 손님이 오는 경우가 워낙 드물어서 신경을 많이 썼다. 공항까지 마중 갈 차와 기사를 마련하고 대외협력 부총장과 협의, 총장과의 만찬까지 줄줄이 잡혔다. 

 

리투아니아 9월 날씨는 종잡을 수가 없다. 첫 해에는 유난히 긴 인디언 서머로 화창한 날이 많았었지만, 이번 해 9월은 금방 초겨울로 접어들었다. 아직 한국은 늦더위가 기승일 때였다. 손님들은 가져온 옷들을 죄다 껴입어야 했다. 카우나스에서 VMU와의 일정은 대학에서 안내해 주는 2시간 정도의 시내 투어로 시작되었다. 나도 따라다니면서 아직도 모르는 곳이 많은 지 체크를 해봤다. 일 년 넘는 체류가 헛되지 않았는지 대부분의 기본적인 투어 설명은 이제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러시아 정교회 건물이었다가 지금은 가톨릭으로 바뀐 성당, 1972년에 소련에 항거해 분신자살한 Romas Kalanta 기념물, 비타우타스 대공의 동상, 자유로를 벗어나 구시가에 들어서면 보이는 13세기 중세 한자동맹과 관련된 독일식 건축, 구시가 광장을 지나 카우나스 성에 이르는 코스다. 자유로와 구시가만 간단히 둘러보는 투어였으니 2시간이다. 박물관이나 외곽의 수도원, 호수, 민속촌 등을 생각하면 투어는 간략하기 그지없다. 카우나스는 20만 명 남짓 되는 작은 도시 치고는 볼 게 많은 편이다. 

자유로 중간의 광장에 서있는 비타우타스 대공 동상, 옆의 시청사에는 자매결연 맺은 도시들의 문장이 있다. 맞은편에는 분신자살로 소련에 항거했던 청년 칼란타의 발자국 조형 기념물.

VMU에서는 총장과 부총장이 함께 구시가지의 레스토랑을 잡아 만찬을 초대해 주는 성의를 보였다. 서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지라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리투아니아 국민 스포츠인 농구 이야기와 전통 벌꿀술에 힘입어 꽤나 즐거운 만찬이 되었다. 마침 유럽 농구 리그가 진행 중이었고 그 날 독일을 상대로 리투아니아 팀이 이겼다. 우리나라에서 한일전 축구 응원하듯 사람들이 들떠 있었다. 만찬 장소가 구시가 광장의 Hunter’s House였는데, 사슴이나 토끼 등 야생동물 고기 요리를 내세운 전통식당이었다. 사슴고기를 선택하는 데 약간 용기가 필요했지만, 함박스테이크처럼 먹기 좋게 나와서 별다를 것은 없었다. 


더 인상적이었던 메뉴는 처음 마셔본 독한 벌꿀술이었다. 알코올 중독이 큰 문제인 리투아니아에서 보드카는 40도 이상 제조가 불가능하다. 반면 전통술인 벌꿀술(mead)은 전통 보존 차원에서 도수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했다. 약한 것도 있지만 대접하는 의미에서 35도, 50도, 75도까지 독주가 이어졌다. 작은 잔으로 맛만 보는 정도였지만, 75도짜리 '잘기리스(Zalgiris)' 술은 살짝 겁이 났다. 의외로 잘 넘어갔지만 역시나 식도부터 뜨거워지는 엄청난 술이었다. 리투아니아에서 제일 독한 술을 이렇게 접해보았다. 잘기리스는 비타우타스 대공 이야기의 하이라이트 전쟁터 이름이다. 폴란드나 독일에 가면 '그륀발트' 전투로 기억되는 독일 기사단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의 전쟁인데, 리투아니아에서는 무조건 잘기리스다. 카우나스의 농구팀 이름이기도 하다. 

초록색 병의 75도짜리 잘기리스 벌꿀술

VMU와 교환학생 협정을 맺은 한국 대학이 이미 10곳 정도 되는데,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서 적은 편이다. 수도인 빌뉴스의 VU가 규모나 역사 면에서 더 폼나는 상대라는 점은 분명했지만, 동아시아 센터나 한국학 전공은 VMU에만 있었기에 실질적인 협력은 카우나스에 강점이 있다. 다음 날에 VU도 방문해서 대외협력 담당자들을 면담하였다. 아무래도 지방 대학교인 VMU보다는 명문대로서의 자부심이 있다. 그래서인지 적극적으로 학교 설명을 하거나 협력협정에 열성을 보이는 느낌이 별로 없었다. 한국 대학들과 교환학생은 오고 가지만 한국어나 한국학 과목은 없는 상황이다. 아무래도 한국은 아직 주요 관심 대상이 아닌 듯했다. 그래도 인구 50만 명 가까이 되는 수도 빌뉴스의 유서 깊은 대학이고, 앞으로 협력을 하게 되면 좋은 거점이 될 터이다.


빌뉴스 대학은 16세기경부터 내려온 오래된 건물들을 유지하고 있어서 구시가의 대표적인 관광지이기도 하다. 1년 동안 가족이나 지인들이 왔을 때 관광객으로서 입장료 1인당 1.5유로를 내고 둘러본 적이 있었다. 업무상 공식 방문으로 갔더니 관광객들에게는 쉽게 공개하지 않는 본관의 도서관이나 천문대 건물 내부까지 1시간 가까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수백 년 된 필사본들을 잘 보관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도서관이나 발트 지역에서 최초였다는 천문대 빌딩도 여전히 학생들과 교수진이 사용하고 있다. 사용자 입장에서는 문화재 지정에 따른 제약 때문에 불편하겠지만, 방문객으로서는 고색창연한 분위기가 부러울 따름이었다. 

빌뉴스 대학의 오래된 도서관과 옛 교수연구실은 중세풍의 분위기를 복원, 보존하는 노력이 대단하다.

협의를 위한 방문이 끝나고 주어진 오후 나절의 소중한 여유 덕에 지도교수님과 빌뉴스 구시가 곳곳을 돌아보며 그동안 밀린 수다도 풀어놓을 수 있었다. 빌뉴스 한복판에서 한국말로 교수님과 대화하자니 같은 내용이라도 더 흥미롭게 느껴졌다. 리투아니아는 물론이고 발트 지역 자체에 출장이 처음이라고 하시니, 아직 여기가 한국에서는 참 먼 나라라는 것도 새삼 느껴졌다. 처음 오신 만큼 전통음식도 드셔 보시라고 감자로 뒤덮인 식사도 하면서 칼로리를 폭발적으로 섭취했다. 

빌뉴스 대학의 유명한 채플, 모든 방문객의 포토포인트 성 안나 성당, 저녁은 구시가 한켠의 조지아 식당에서 고기와 감자.

최근에 발트 지역에도 한국 여행사들의 패키지 투어가 늘어나면서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다. 아직 유럽 여행의 우선순위에서는 한참 밀린다. 일단 와 본 사람들은 '의외로 좋다'는 평가 일색이다. 처음 와보신 지도교수님도, 함께 출장 온 교직원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냉전 이후 체제 전환의 성공사례이기도 하고, EU 가입과 함께 유럽식 운영방식이 자리 잡고 있으며, 중세 유럽의 분위기와 소련 시절의 딱딱한 분위기가 공존하고 있어서 흥미로운 경험이 된다. 물가도 아직 비교적 싸서 만족도가 더 높은데,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으니 빨리 방문하는 것이 좋다.

빌뉴스의 구시가는 소박하면서도 중세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색깔과 모양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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