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유리 Mar 09. 2018

한국학 수업 개강

2017년 8월 29일

공식적인 개강일은 9월 1일이지만, 신입생을 제외한 2~4학년 수업은 해당 주간의 월요일인 마지막주에 수업이 시작된다. 첫 해 첫 수업을 앞두고 꽤나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비자 신청을 위해 이민국 서류를 준비하고 왔다 갔다 하느라 뭔가 정돈되지 않은 느낌이 겹쳐 있었다. 괜한 걱정을 해 가며 수업 준비에 공을 들였다. 첫 주간은 그저 짧게 강의 소개만 하는 것이었음에도 꼼꼼하게 체크하고 영어로 인사까지 연습해서 들어갔었다. 시간마다 강의동 경비실에서 열쇠를 받아 강의실 문부터 열고 들어가는 식이다. 교수가 열쇠를 들고 갈 때까지 학생들은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한국 관련 수업은 현지인 강사들이 하는 어학 수업을 제외하고는 내 수업이 유일하다. 그중 한국사는 동아시아 학부 필수과목이어서 해당 학년 학생 전원이 자동으로 수강하게 되어 수강 인원이 거의 70명에 육박하였다. 

동아시아학부가 입주한 새 학교 건물 4층에는 테라스가 있어서 맑은 날이면 햇빛이 호사스럽다. 

일 년간 두 학기를 지나고 다시 새 학년도가 되면서 수업도 반복이 되도록 배정되었다. 두 번째로 강의하게 되는 것이라도 여전히 긴장은 되었다. 그래도 새로운 내용을 준비하는 상황을 면하고 나니 한결 여유롭게 학기를 맞게 되었다. 처음 강의 시작하면서 당황스러웠던 부분들도 적응이 되어서 익숙한 척 대처하게 되었다. VMU는 다른 리투아니아 대학들보다도 유난히 국제화와 개방성, 다양성을 강조하는 학교였다. 한국의 대학 수업과 가장 눈에 띄게 달랐던 점이 학생들에게 출석을 강제할 수 없는 거였다. 출석 여부가 학점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주간에 아르바이트나 일을 병행하는 학생이 많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강의 자료만 따로 받아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시험 때만 와서 훌륭한 답변을 쓴다면 그 과목을 패스하는 데 문제가 없다. 

2016년 가을에 새로 지은 본관으로 옮겨가면서 카우나스에서 가장 모던한 빌딩 중 하나에 드나들게 되었다. 

심지어 같은 시간에 다수의 과목을 중복 신청할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이 부분은 좀 충격적이었다. 수강생 중에서 동아시아학이 부전공인 학생들 중 상당수가 같은 시간에 본인들의 전공수업이 겹쳐 있다며, 자신은 출석을 할 수 없다고 당당히 통보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결과적으로 70명에 육박하는 수업도 실제 출석 인원은 절반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한두 학기 그렇게 지내고 나니 그런 상황이 적응은 되었지만, 아무리 'Liberal Art'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이건 지나치게 자유로운 것 아닌가 싶다. 대학의 수업시간과 교수의 권위를 중시하는 한국에 익숙해져서 내가 보수적으로 사고하는 것인지 자문해보았지만, 아무래도 중복 수강신청까지는 좀 너무 나갔다는 느낌을 아직도 갖고 있다. 


첫 수업 때 학생들과의 첫 대면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들이 기억에 남는다.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이었기 때문에 집중해서 듣느라 그랬던 것도 같다. 수업 계획과 과제를 설명해주고 질문이 있냐고 했을 때는 조용하더니, 소개를 끝내고 인사를 하고 나니 개인적으로 이것저것 물어보겠다고 남는 학생들이 많았다. 공개 질문은 영어 때문에라도 저어하게 되는 건 아시아 학생들과 정말 비슷하다. 대부분은 영어가 유창한데, 그래도 영어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도 많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몇몇 학생이 영어를 이유로 발표를 에세이로 대체해달라는 요청을 해 오기도 했다. 아마 교수들이 이런 요청을 다 이해하고 들어주는 편인 듯했다. 학생들이 영악하다면 이렇게 자유롭고 많이 봐주는 분위기를 십분 활용해서 꾀를 부리게 될 것 같은데, 크게 부작용 없이 매 학기가 지나간 걸 보면 아직 이곳 학생들이 순진하다는 생각도 든다. 

새 본관의 중앙도서관은 뻥 뚫린 구조다. 이곳의 도서관은 조용히 혼자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소통하고 토론하는 곳이다.

대부분 아시아 여성들이 유럽에 오면 나이보다 훨씬 어리게 보인다. 정장을 하지 않으면 무조건 학생으로 간주된다. 처음에 학생들 앞에서 그래도 배울 것 있어 보이는 교수가 되어보고자 한국에서 잔뜩 챙겨간 정장에 높은 굽 구두까지 신었다가 고생이 심대했다. 이곳 보도블록은 서울에서 많이 신던 뾰족한 하이힐을 단박에 포기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구시가지도 아닌데, 불규칙한 틈새와 높낮이가 도무지 개선되지를 않는다. 사실 대부분 유럽 도시들이 마찬가지이긴 하다. 길을 새로 깔아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너무 학생처럼 보이기 싫어서 몇 달간은 고집스럽게 정장에 높은 굽을 고수하고 다녔다. 수업시간 외에는 바로 숙소에 와서 쉴 수 있었기에 얼핏 고행 같은 그 고집을 어느 정도는 지속할 수 있었다. '객원교수'라고 불리지만 업무는 시간강사와 마찬가지여서, 맡은 수업 이외에는 전혀 의무 사항이 없다. 다른 협의 사항이 있어도 어차피 이메일로 주고받는 방식이 잘 정착되어 있어서 연구실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결국 정장도 하이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도래한 긴 겨울의 시작과 함께 곧 끝났다. 

맑은 날의 자유로는 등하교길이 더 길기를 바랄 정도이다. 바닥이 평평해보이지만 뾰족구두는 수없이 틈에 빠진다.


이전 02화 카우나스의 낯선 한국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