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6일
한국 사람들에게 리투아니아가 생소한 것처럼,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도 한국은 미지의 나라이다. 국제기숙사에 살고 있으니 의외로 많은 외국인들이 보이고 국제화 수준이 높게 느껴지지만, 일단 거리에 나서면 단연 눈에 뜨이는 이질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수도인 빌뉴스는 외국인 비율도 높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권 교민도 적게나마 있다. 카우나스는 소수의 유학생이나 교환학생을 제외하면 아시아인은 극히 드물었다. 두 번째 도시라지만 수도와의 격차가 커서, 유리로 도배된 고층빌딩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다.
동서로 뻗은 중심가인 보행자 전용 자유의 거리(Laisves Aleja, Liberty Street)를 걷다 보면 여기저기서 눈길이 느껴진다. 아이들은 대놓고 빤히 쳐다보기도 한다. 아시아 사람이 흔한 서유럽에서는 대놓고 쳐다보는 일은 거의 없어졌는데, 여기는 그게 아니었다. 카우나스는 인구가 특히 동질적인 곳이었다. 러시아 인구 비율도 꽤 높고 러시아어가 흔히 들리는 빌뉴스와 달리, 카우나스는 리투아니아어만 들리는 리투아니아의 민족성이 살아있는 도시라는 자부심이 있다. 발트 지역의 좀 크다 하는 도시 중에 거리에서 러시아어가 들리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는데, 카우나스가 바로 그 도시였다. 그만큼 이방인의 존재는 신기한 것이다.
파견을 온 곳이 대학이고 카우나스 도심은 사실상 대학도시 같은 느낌이다. 영어권이 아니었음에도 영어 소통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적응을 위한 과정 중에 혹시나 영어가 통하지 않을 것을 대비해 리나스 교수가 바쁜 와중에도 열심히 동행해 주었는데, 은행이나 마트, 심지어 교통카드 파는 길가의 가판대에서도 서툴지언정 영어로 불가능한 일은 없었다. 리투아니아 어가 어렵기로 악명 높다는 엄포를 첫날부터 들었기에 첫 학기는 영어로만 살았다. 그래도 1년을 넘게 사는 것이니 언어를 좀 배우자 싶어 두 번째 학기에는 기초 과정에 도전해 보았다. 과연 지독하게 어려워서 인사말 정도에서 포기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을 듯했다. 그래서 인사말이나 식당 메뉴 정도만 리투아니아 말로 하는 수준에 멈추었는데, 이 사람들은 거기에도 깜짝 놀라거나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과도하게 기뻐하기도 해서 아주 잠깐씩 학습 의욕이 다시 살아나기도 했다. 외국인이, 심지어 동양 여자가 리투아니아 말을 발음이라도 시도하는 게 너무나 신기한 모양이다.
한국의 역사나 정치, 사회를 가르치는 한국학 객원교수로 왔고, 기한을 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2년을 머물게 되었다. 첫가을의 개강을 앞두었던 처음에는 당연히 긴장과 기대가 교차하고 있었다. VMU는 소련 시기에 폐교되었다가 1990년대에 다시 개교하면서 하버드 출신 교수들이 돌아와 미국식 제도를 적용했다고 한다. 어차피 영미권의 대부분 학교들이 9월 개강이니 큰 차이는 없었다. 9월 개강은 1년의 시작이기에 학생들 상대로 이런저런 오리엔테이션이 있다. 리투아니아어로 하기 때문에 외국인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다. 그래도 맨 처음에는 일부러 얼굴도 익힐 겸 동아시아학부 오리엔테이션에 들어갔었다. 신기한 눈길은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멀리서 날아온 객원교수에게 별달리 엄청난 기대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인사를 건네 오는 학생도 거의 없었다. 알고 보니 리투아니아 학생들은 미국이나 서유럽과 딴판으로 대단히 얌전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예전의 아시아 학생들과 비슷한 성향이었다. 강의실 분위기도 무반응에 가깝다. 미국 학생들처럼 공격이 들어올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처음 와서 영어로 강의하는 입장에서는 못내 안심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리투아니아에서 '동아시아'라고 하면 먼저 떠올리는 나라는 무조건 일본이다. 동아시아학부에서도 세부 전공으로는 일본학이 가장 많고, 최근에 당연하게도 중국의 영향력과 파급효과가 거세다. 학생마다 편차는 있지만 동아시아에서도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지식은 백지에 가까웠다. 학부 과목으로 가르치게 된 '한국 문화의 역사'의 경우 한국의 중고등학교 국사 중 지극히 핵심만 발췌하고 문화적인 흥미 거리를 넣어야 하는 수준이었다. 첫 학기에는 대학원 수업도 하나 있었다. 제목이 '1945년 이후 한국의 정치와 사회' 였는데, 이 친구들도 일본이나 중국 위주로 공부했을 뿐 한국에 대해서는 백지에 그림 그려 넣는 느낌이었다. 수업으로 한국을 공부하기는 처음이라는 학생이 대부분이어서 이들의 한국 첫인상을 내가 결정하는 부담감도 들었다. 리투아니아에 와서 내 인생의 한 장을 새로 쓰게 되었는데, 동시에 누군가의 인생 페이지에 한국에 대한 첫 줄을 쓰게 해주는 일이기도 했다.
키 크고 투명한 눈에 금발머리를 가진 리투아니아 사람들과 어떻게 소통할지 처음에는 걱정이 없지 않았다. 한국에서 여자 평균 이상이었던 내 키가 다행히 여기서 난쟁이까지는 아니었다. 여자 평균의 좀 아래인 듯했다. 시선이 너무 차이 나면 하이힐을 신고 다니려고 생각도 했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게다가 공사 중인 곳이 많고 포장이 꼼꼼하지 않은 보행로에서 하이힐은 불가능하다고 판명되었다. 간혹 농구선수나 러시아 레슬러 같은 남자들도 있어서 영어가 원활하지 않을 때는 겁이 나기도 했다. 대부분은 지극히 소박하고 부끄럼도 많고, 좀 익숙해져서 웃게 되면 순수하고 친근한 대화가 이어진다. 물론 우리가 인종차별이라고 부르는 현상 – 길가다 '곤니찌와' 등등 괜히 던지는 인사말들 – 은 일 년 이상 똑같은 거리를 지나다녀도 없어지지 않았다. 겉모습부터 다른 사람들이 서로를 다르지 않게 보게 되기까지 1~2년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