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8월 23일
2016년 8월 말 오후 나절에 도착한 카우나스는 잔뜩 흐리고, 막 비가 시작되는 참이었다. 여름이 끝나가는 8월 말이었으니 그래도 아직 여름인데, 첫인상은 이미 완연한 가을이었다. 그것도 길고 우울하다는 긴 겨울을 코앞에 둔 늦가을 같았다. 첫날이 하필 흐리고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후로는 9월까지도 화창하고 쾌적한 북유럽 여름 날씨가 꽤 여러 날 동안 눈부시게 펼쳐졌다. 도착한 첫날은 유난히도 흐렸고, 밤새 추적추적 비가 오면서 양철로 받쳐 둔 처마에 빗물이 튕기는 요란한 소리까지 겹쳤다. 만약 도착했던 날 그 이튿날처럼 맑고 밝은 햇살이 내리쬐었더라면 리투아니아에 대한 첫인상도 밝고, 예쁘고, 깨끗하고 동화 같은 '중세 유럽 분위기'로 다가왔을지 모른다. 어쨌거나 내 첫인상은 흐린 날로 인해 어두웠고, 낡고, 흐릿하고, 한적한 풍경이었다.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는 상당히 동쪽에 치우쳐 있다. 수도 빌뉴스의 공항에서부터 국토 중앙에 위치한 두 번째 큰 도시 카우나스까지는 차로 한 시간 반 가까이 걸린다. 리투아니아는 물론이고 발트 지역에 처음 와보는 한국인 객원교수를 데리러 학교에서 차를 보내주었다. 기사 아저씨가 서툰 영어로 나름 유쾌하게 그 한 시간 반을 채워주지 않았다면 첫인상은 더없이 우중충할 뻔했다. 우중충한 날씨에다가 도로공사를 하는지 보도블록을 잔뜩 들어내서 더욱 황량한 느낌을 준 국제기숙사까지, 첫인상이 급격히 악화될 상황이었다. 숙소 문 앞에서 내 파견 생활을 도와줄 동료 교수 리나스(Dr. Linas Didvalis)가 기다리고 있었고, 최대한 안심을 시키고자 환대해준 이 사람들 덕분에 악화 일로를 달리던 첫인상을 정리하고 기분을 붙들었다.
카우나스의 비타우타스 마그누스 대학교(Vytautas Magnus University, VMU)는 유럽 많은 대학들이 그렇듯 따로 구별된 캠퍼스 없이 도심 이곳저곳에 건물들이 산재되어 있다. 국제학생용 기숙사 꼭대기 층에 따로 교수진을 위한 아파트형 숙소가 있고, 학교에서 숙소를 제공하게 되어 있는 계약 조건에 따라 나는 비용 없이 체류 기간 내내 이곳에 머물 수 있었다. 학생 시절에도 기숙사 생활을 해본 적이 없었다. 주로 교환학생들이 거주하는 국제기숙사 생활은 여기가 한국이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경험이었다. 하물며 전체 인구가 300만 명 남짓 된다는 발트의 작은 나라 리투아니아, 거기에서도 두 번째 큰 도시라지만 20만 명 정도 되는 작은 도시 카우나스에서 난생처음 기숙사 생활이다. 새로운 곳에 가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테고 놀라거나 낙담하지 말자는 각오가 있었다. 우울한 첫인상을 달래고 기분을 붙들어 들어간 방은 먼지가 몇 달은 쌓였음직한 상태였다. 소위 '액땜'이나 '예방주사'라고 하기에도 좀 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도 안 된 방에서 빗소리를 들으면서 '그래도 방에 바로 들어온 게 어디야' 식의 위안을 되뇌며 하룻밤을 보냈다. 여기가 구소련에서 벗어난 지 30년도 안 되었고, 유럽연합에 가입한 지 15년도 안 되었고, 1인당 GDP도 우리나라의 절반도 안 되는 개도국이라는 점 등도 새삼 되새겼다. 그래도 청소가 하나도 안 된 숙소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되어주지는 못했다. 짐도 풀지 못한 채 어디 닿을 세라 새우잠을 자고 나서 아침이 되니 아주머니가 나타나 방을 한 번 닦아 주었다. 물론 한국식으로 발 벗고 다닐 수 있는 방을 만들기 위해서는 결국 직접 갈아엎듯 닦는 청소를 더 해야 했다. 후에 긴긴 겨울을 지나면서 이 강렬했던 첫날밤이 꽤나 효과적인 예방주사였다는 생각을 하기는 하였다. 우중충하고 낡은 건물, 행정적인 느릿함까지 절감하게 해 준 첫인상과 첫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