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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리 Apr 18. 2018

겸임국 지방도시에서 대사관 괴롭히는 방법

2018년 1월 17일

리투아니아에는 한국대사관이 없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주폴란드 한국대사관에서 리투아니아를 겸임한다. 평소에 대사관 갈 일은 물론 거의 없지만, 간혹 서류 관계로 급하게 필요할 때면 비싼 비행기를 타거나 7시간이 넘게 걸리는 버스로 다녀와야 해서 불편함은 존재한다. 가끔 교환학생들이 여권을 분실하는 등의 '사건'이 생기면 현지에 대사관이 없다는 점이 확 다가온다. 카우나스 VMU에 있는 기간 동안 주 폴란드 한국대사관으로부터 기대보다 훨씬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첫 한 학기 동안은 대사관이나 문화원에 뭔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다 2017년 1월에 처음으로 바르샤바에 가서 한국대사님과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 후로 일 년 사이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카우나스의 VMU 입장에서는 한국대사관과 문화원의 적극적인 협조로 한국학의 위상이 일취월장한 일 년이었고, 주폴란드 한국대사관과 바르샤바 문화원의 입장에서는 겸임국 지방도시의 한 대학교 때문에 일거리가 늘어나서 힘들었을 일 년이었다. 

2017년 아시아 주간에 처음 VMU를 방문한 한국 대사님 일행과 VMU 총장, 교수진 (사진 by Jonas Petronis)

폴란드는 유럽의 중국이라 부를 정도로 인구도 많고 시장도 크고 경제발전 속도도 빠른 신흥국이다. 바르샤바의 대사관과 문화원은 이미 폴란드만으로도 바쁘고, 겸임국인 작은 나라 리투아니아에 크게 관심을 쏟지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했다. 게다가 수도 빌뉴스도 아닌 카우나스에 위치한 VMU에서 동아시아 관련 행사를 열면서 대사관의 관심을 받기는 더 어려웠다. 2016년까지만 해도 아시아센터가 해마다 대사님의 참석 가능성이라도 물어보려고 초청장을 보냈지만 회신조차 받기 어려웠다고 한다. 행사에 직접적인 지원을 받거나 협력 요청을 하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고 한다. 리투아니아에 대사관이 있는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일단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한국대사관과 문화원은 소통도 쉽지 않고 뭘 부탁하기도 미안한 대상이었다. 

바르샤바 와지엔키 공원 근처의 한국대사관

2016년 말 폴란드에 새로 오신 대사님은 한국에서 공공외교, 문화외교에 전문적으로 경력을 쌓은 분이었다. 겸임국에도 좀 더 관심을 주실 듯한 인상이 풍겼다. VMU에서 새해를 맞아 동아시아 관련 행사 계획을 넣어서 보낸 초청 이메일에 웬일로 협조적인 답장이 왔다고 했다. 부임 후 연말이 지나고 리투아니아에 첫 방문을 하셨다. 동아시아 학부장이던 아우렐리우스 교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빌뉴스에 가서 직접 인사하고 의례적으로라도 협조 요청을 하자고 했다. 일본 전문가인 아우렐리우스 교수는 직접 얼굴 보고 이야기하는 게 중요한 아시아 문화를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런다고 과연 관심을 끌 수나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카우나스에서 한국학 객원교수까지 두면서 애를 쓰고 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보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빌뉴스의 호텔까지 같이 가서 인사를 했다. 

2017년 3월의 아시아 주간 개회식은 처음으로 한중일 3국 대사를 모두 모셨다.

다행히 주 폴란드 대사관의 지역 전문가인 1등 서기관님과 몇 년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마침 그 서기관님도 같이 오셔서 친근한 분위기로 대화를 열 수 있었다. 대사님은 예상보다 협력과 지원에 훨씬 적극적이었고, 겸임국에도 대사관 차원에서 일본과 중국 못지않게 한국학에 힘을 실어줄 수 있을 듯한 희망이 보였다. 3월마다 개최하는 VMU의 아시아 주간(Asian Week) 행사 때 초청하고 싶다는 조심스러운 제안에, 카우나스까지 직접 와서 축사를 하겠다는 흔쾌한 답까지 들었다. 일본과 중국 대사들이 해마다 축사하러 오는 행사에 한국만 없었는데, 처음으로 한국 대사도 참석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대사님의 흔쾌한 대답과 실제 참석 사이에는 거칠 과정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리 낙관하지는 않았다. 아시아센터에서는 진짜 실현된다면 카우나스에 최초로 방문하는 한국 대사가 될 것이고, 이런 긍정적 반응부터 이미 처음이라며 기뻐하고 있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7시간 운전해서 도착한 바르샤바 한국문화원 앞

학부장이자 아시아센터장이었던 아우렐리우스 교수와 한국학 담당인 리나스 교수는 한국대사와의 만남과 긍정적인 반응에 크게 고무되었다. 대사관과 문화원은 한 조직이나 마찬가지다. 바르샤바의 한국문화원은 상당히 규모가 크지만, 협조를 구하고자 보낸 이메일에 답신을 받은 적이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대사님이 호의적이라면 바르샤바 한국문화원으로부터도 예전과 달리 좀 더 협력을 기대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대사님과 인사를 하고 일주일 정도 후, 아예 바르샤바까지 출장을 가서 문화원을 방문하고 문화원장님도 만나서 협력을 구하는 적극적인 시도를 했다. 당연하게도 한국인인 내가 같이 가는 게 도움이 될 터였다. 리나스 교수가 7시간 가까운 거리를 운전해서 1박 2일로 가는 출장에 나도 합류했다. 추운 겨울 장시간의 자가용 여정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한국의 관심 밖 지역이었던 겸임국 리투아니아의 지방도시 카우나스에서 한국 정부의 관심을 끄는 작업에 기여하게 되어 뿌듯하기도 했다. 

처음 만나서 협력을 다짐해주신 문화원장님과 인증숏

바르샤바는 대학원 시절 동구권 체제 전환 관련 학술과제 출장을 온 뒤로 두 번째 가보는 것이었는데, 놀랍게도 나보다 아우렐리우스나 리나스 교수가 더 오랜만에 간다고 했다. 그만큼 의미 있는 방문이 되기를 다들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새벽 5시에 출발하여 편도 1차선의 도로 중앙선을 넘나들며 수많은 트럭을 추월하고 점심 나절에 바르샤바에 도착했다. 바르샤바의 한국문화원은 새로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시설도 좋고 멋진 건물이었다. 세종학당도 같이 있고 다양한 문화행사를 하기도 좋다. 인상 좋은 문화원장님과 직원들을 만나니 맘 같아서는 바로 한국어로 편하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동료 교수들을 고려해서 영어로 하면서 통역도 하고 내 의견도 덧붙였다. 아우렐리우스 교수가 영어로 매우 예의 바르게 공식적인 협력 요청을 하는 중간중간에 한국말로 '일본이나 중국보다 초라해 보여서 속상하다'는 류의 개인적인 욕심을 끼워 넣었다. 신임 대사님의 공공외교에 대한 넘치는 열정이 이미 전염되었는지, 역시 얼굴 보고 이야기하니 설득력이 있었는지, 문화원에서도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해 주었다. 

처음 협력 요청 드린 지 두 달만에 열린 아시아 주간에서 활약해주신 주폴란드 대사님 (사진 by Jonas Petronis)

일이 되기 시작하니 이후로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직접적인 성과는 바로 두 달 후 3월 초에 개최한 제3회 아시아 주간에 나타났다. 대사님 일행은 굳이 대사관 전용차에 태극기까지 꽂고 육로로 7시간 걸려 카우나스까지 달려왔다. 처음으로 한국대사가 리투아니아 주재 일본대사, 중국대사와 나란히 개막식 축사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사상 첫 카우나스 방문이었기에 일부러 개막식 후에 한 시간 한국대사 특강도 만들었다. 교실 한 가득 청중이 모여 성황이었다. 일주일 간의 아시아 주간 행사의 백미인 '문화 체험의 날'에는 바르샤바의 한국문화원에서 폴란드의 대도시 광장에서나 할만한 규모로 한복체험, 한글 판화, 탈 그리기, 한국 풍경 사진전, 동계올림픽 홍보 세트까지 하나 가득 싣고 와서 모든 행사 부스를 압도했다. 학생들과 지역사회 반응도 너무 좋아서 일 년 내내 화젯거리가 되었다. 

2017년 아시아 주간에 처음, 한국 부스밖에 안 보일 만큼 많이 준비해오신 바르샤바 한국문화원 분들

첫 단추가 잘 꿰어지면 다음번에는 자연스럽게 반복되고 발전하게 마련이다. 일 년이 지난 2018년 아시아 주간은 작년보다 더 적극적인 도움을 받게 되었다. 사실 대사관의 공공외교 우선순위에서 카우나스는 여전히 한참 처진다. 주재국인 폴란드가 중요하다. 리투아니아에는 수도 빌뉴스에 한인회와 세종학당이 있으며, 카우나스 VMU는 한국학 전공이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아직도 별로 사안이 없다. 그래도 도움이 필요하다고 적극적으로 손을 들고 얼굴을 내밀다 보니 기대보다 훨씬 많은 공감과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다. 화려한 기획행사나 재정 지원이 없더라도 대사 방문이나 문화원 행사 같은 관심 표명은 큰 도움이 된다. 

전문적인 한국 문화 체험 행사도 카우나스에서는 사실상 처음이라 학생들에게는 모든 것이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항상 일본과 중국 대사들만 있고 일본대사관과 공자학원의 커다란 행사부스만 바라보느라 한국 전공 학생들이 위축된다고 했었다. 한국 정부에서 관심을 갖고 있다는 표시만으로도 지역사회에서 한국의 존재감이 커지고, 한국 전공 학생들 표정이 의기양양해진다. 한류 팬들도 많으니 상승효과도 크다. 심지어 일본이나 중국을 전공하는 학생 중에도 갑자기 기말 페이퍼나 학부 논문에서 한국을 다루겠다고 찾아오는 숫자가 늘어났다. 이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물론 대사관과 문화원도 잘 알고 있다. 워낙 바쁜 업무 때문에 겸임국, 심지어 지방도시까지는 신경을 쓸 수 없는 것이다. 대사관과 문화원 직원들의 과중한 업무량을 더 늘리는 일임을 잘 알고 있지만, 파급 효과가 워낙 커서 얼굴 두꺼운 척 계속 부탁하고 괴롭힐 수밖에 없을 듯하다.

2017년 6월 폴란드 바르샤바 한국문화원 주관 코리아 페스티벌 행사에 함께 참석한 VMU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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