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은 누구인가? - 개인적 고뇌를 가진 탐정이 보여주는 범인 색출과정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창기 작품들은, 아서 코난 도일이나 윌리엄 아이리쉬, 그리고 아가사 크리스티와 같은 이전 시대의 작가들이 발표한 작품들처럼, ‘범인은 누구’라는 수수께끼에 집중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의 사건 해결사들이 지니는 세부적인 특징에 있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은 그 이전의 소설들과 차별화된다. 이러한 차이점을 자세하게 들여다 보기 위해서는, 우선 히가시노 게이고 이전 작가들의 작품에서 제시되는 사건 해결사의 모습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추앙 받는 아서 코난 도일의 경우, 『셜록 홈즈 시리즈』를 통해 변장술과 격투, 심지어 의학과 자연과학에도 능통한 탐정의 모습을 제시하였다. 사실상, 범인들과의 총기 싸움에서도 밀리지 않고[1] 절벽에서 떨어졌는데도 상처하나 없이 살아남는 홈즈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독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영웅 소설의 일부를 읽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곤 한다. 그리고 이처럼 극단적으로 전지전능한 영웅적 성격을 가진 사건 해결사의 모습은, 독자들로 하여금 비현실성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와 같은 문제를 최소화하고 탐정의 모습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였을까? 셜록 홈즈가 지닌 팔방미인의 모습이, 아가사 크리스티나 엘러리 퀸의 소설 속 주인공들에 이르러서는 많이 완화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건 해결사들마저도 여전히 ‘초인간적인 고결함’을 잃지 않은 채, 그 어떠한 세속적인 고뇌조차 겪지 않는다는 한계를 지닌다[2].
이와 대조적으로,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에 나타난 사건 해결사의 모습은 개인적, 세속적 고민을 지닌 ‘고뇌하는 탐정’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비록 1900년대 초반에 발표된 윌리엄 아이리쉬의 『환상의 여인』에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가진 주인공의 모습이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지만, 그 주인공이 실질적인 사건 해결사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뇌하는 사건해결사’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 것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창기 작품들을 기점으로 삼을 수가 있다.
특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데뷔작인 『방과 후』, 『가가 형사 시리즈』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작품인 『졸업: 설월화 살인 게임』과 『잠자는 숲』, 그리고1980년대의 마지막 해에 발표된 『십자 저택의 피에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작품들 중에서도 ‘고뇌하는 탐정’의 모습이 가장 잘 드러난 소설들이다. 『방과 후』에는 미지의 범인으로부터 스스로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년탐정의 고민이[3], 『졸업: 설월화 살인 게임』에는 법과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졸업반 학생의 고민이[4], 『잠자는 숲』에는 용의자를 사랑하게 된 경시청 형사의 고민이[5], 그리고 『십자 저택의 피에로』[6]에는 초자연적 현상을 두려워하는 인형사의 고민이 담겨있으며, 사건 해결사들은 이처럼 제각기 다른 고민들을 가슴 속에 간직한 채 사건의 핵심으로 서서히 다가서게 된다.
그렇다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1980년대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추리소설의 양상이 변화하게 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그 원인의 이면에는 아마도 그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시대 상황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중, 후반은 소비에트 연방이 조금씩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던 시기였다. 이처럼 1900년대 초반부터 줄곧 미국의 자본주의를 견제해 오던 가장 큰 세력인 소련이 몰락해감에 따라, 미국의 자본주의가 세계 곳곳으로 더욱 더 강하게 파급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1980년대는 일본의 거품경제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던 시기였으므로, 갑작스런 자본주의의 확산과 일본 경제의 뻥튀기 현상으로 인해 세계 시장은 큰 혼란을 겪게 되었다. 보통 인간은 혼란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다른 대상으로부터 즐거움을 찾음으로써 그 혼란을 극복하려는 심리적 본능을 지니고 있는 법이다[7].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즐거움의 대상을 다양한 문학들로부터 찾은 듯 하다. 하지만 단순한 오락적 독서의 개념이 강했던 과거의 추리소설과는 달리[8], 자본주의 발달로 인해 현실적 감각이 성장한1980년대의 독자들은 비현실적인 성격의 등장인물과 마주하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자신과 비슷한 특성을 지닌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 인물들에게 공감하고, 웃고, 때론 같이 눈물 흘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9]. 그 결과, 독자들은 셜록 홈즈나 미스 와플과 같은 평면적인 인물들을 만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하기 보다는, 가가 형사[10]나 고조 신노스케[11]와 같은 입체적 인물들을 마주하는 데 돈을 지출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수요를 감지한 추리 소설 작가들로 인해 추리 소설에 등장하는 사건 해결사들의 모습이 점차 입체적으로 변화해 갔던 것이다.
하지만 1980년대 중, 후반에는, 여전히 추리 소설 내용 자체의 구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서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그 당시 독자들은 기존의 소설 구성 방식에 대하여 식상함을 느끼고 있는 추세였기 때문에, 소설 플롯 자체의 대대적인 변화 없이는 1980년대 중, 후반에 야기된 추리소설의 부흥이 언제 갑자기 끝나도 이상할 상황이 아니었다[12]. 그리고 마침내 1990년대 초,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추리소설의 구성에 있어서의 혁신적인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1] 아서 코난 도일, 『주홍색 연구』, 코너스톤, 2015
[2] 아가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과 ‘탐정 포와로’, 그리고 엘러리 퀸의 소설에 등장하는 ‘탐정 퀸’까지, 모두 도적적으로 완전 무결하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들이 때때로 가지게 되는 고민들마저도 개인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범인들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한 슬픔과 안타까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3] 히가시노 게이고, 『방과 후』, 창해, 2007.
[4] 히가시노 게이고, 『졸업: 설월화 살인 게임』, 현대문학, 2009
[5] 히가시노 게이고, 『잠자는 숲』, 현대문학, 2009
[6] 히가시노 게이고, 『십자 저택의 피에로』, 재인, 2014
[7] 선안남, 『기대의 심리학』, 소울메이트, 2010, 17~18면.
[8] 송덕호, 『대중문학 연구』, 국학자료원, 1997
[9] 유대란, 『추리소설의 융성을 꿈꿨던 계간 「추리문학」』, Chaeg, 2014
[10] 『가가 형사 시리즈』의 주인공 이름
[11] 『십자 저택의 피에로』에 등장하는 인형사의 이름.
[12] 실제로, 이 시기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 작품들은 1990년대 이후의 작품들에 비해 판매량이나 인지도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저조한 수치를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