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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삼숙 Sep 30. 2020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여 안녕

몇주 전 주말에 회사 동료들과 교외에 있는 오리구이집에 간 적이 있다. 왼쪽엔 계곡이 흐르고 그 옆엔 초록 초록한 나무와 풀들이 늘어서 있는 어린시절 기억 저편에 있는 여름방학 풍경과 같은 곳이었다.


오리는 훈제로만 먹어 본 것이 다인데, 직화구이는 양념을 뺀 담백한 닭갈비 같은 맛이었다. 눈앞엔 나무들이 흐드러지게 늘어서 있고, 입안엔 핵꿀맛 고기가 살살 녹고, 옆엔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술이 아주 그냥 쭉쭉 들어갔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와 합석을 하게 되었다. 나의 일행 중 한명과 친구인, 그리고 한때 나의 지인(지인이라고 해야 하나. 그 외에 딱히 적합한 단어를 찾기 어려워 그냥 지인이라고 해 둔다)이기도 했던 그는 인사를 하고 간다는 명분하에 자연스럽게 내 앞자리에 와서 앉았다. 여긴 서울도 아닌 가평이고, 심지어 처음 와보는 산속에 위치한 오리구이집인데 여기서 그를 마주치다니. 본래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법이다.




2014년 8월 여름이었다. 월요일이었고, 장마철이었다(몹쓸 기억력).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야근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에게 카톡이 왔다.


“중요하게 할 얘기가 있는데, 통화할 수 있어?”


뭐지.


그는 나의 고등학교, 대학교 동기였다. 근데 그게 다였다. 같은 반을 한 적도, 함께 어울린 적도 없고, 겹치는 친구도 없는, 그저 우연히 같은 시기에 같은 학교를 다녔을 뿐인, 마주치면 인사를 하는게 다인 사이였다. 아마도 그때까지 서로 연락을 한 적도 없었을거다(연락처가 왜 있었는지 의문임).


우리가 통화를 할 사이인가? 나는 쎄한 기분으로 통화버튼을 눌렀고,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그는 자기가 얼마 전 청담동에서 놀다가 어떤 여자들을 알게 되었고, 그 중 한 여자의 남자친구라는 작자의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그 사진 속에는 당시 나의 남자친구가 있었고,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이상 나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했다고 했다. 그렇다. 그는 ‘제보자’였다. 그는 친절하게 그 여자의 연락처까지 굳이 내게 알려주었다. 나는 그녀와 통화를 했고, 그만 모든 사정을 듣고 말았다.




그 모든게 감당되지 않았던 나는 친구들에게 고민을 토로하였는데, 재밌게도 반응이 두 가지로 갈렸다(아,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재밌다는거지 당시에는 식음을 전폐하고 멘탈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여자인 친구들은 당시 남친에 대한 비난 일색이었다. 이제라도 그 쓰레기성을 알게 되어 얼마나 고맙고 다행이냐며 빨리 헤어지라고 했다.


그런데 남사친들의 비난의 방향은 조금 달랐다. 대체 그 제보자 새끼가 누구냐며 그 새끼가 미친놈이라는 거다. 남자들의 세계에서는 그런 제보를 한다는거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고,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그딴 제보를 한 것이며, 무엇보다 나랑 친하지도 않은데 그걸 알렸다는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그냥 너 새끼 한 번 죽어보라는 거라고 했다.


알고 보니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그보다 한 기수가 높았던 나의 구남친은 어떠한 집단에서 선발 절차를 담당하였는데, 면접장에서 면접을 보러 온 그 제보자에게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언행을 대놓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를 가차없이 탈락시켰다. 앙심을 품은 제보자는 우연히 알게 된 그 사실을 여친인 나에게 알린 것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우리는 지옥같은 두어달의 시간을 겪은 후 헤어졌다. 그리고 나는 제보자와 전과 마찬가지로 그 후에도 단 한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다.




그렇게 정확히 만 6년이 지난 지금 여기 그가 내 앞에 앉아 있다(실화냐...). 그리고 여긴 서울도 아닌 가평이고, 태어나 처음으로 오리 직화숯불구이라는 것을 먹고 있는데(그와중에 JMT...) 내 눈앞에 그가 있다(진정 실화냐...). 그는 웃으며 정말 오랜만이라고, 잘 지냈냐고 묻고 있다(싸이코패스냐... 아니면 기억상실증 환자냐...). “그러게 정말 오랜만이네”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불편한 어색함을 외면하기 위해 술만 연거푸 들이켰고, 계곡 소리와 어우러져 모든 것이 꿈만 같이 느껴졌다.


사실 나는 이따금씩 그를 떠올렸고, 많이 원망했다. 그가 나한테 그런 제보를 하지 않았다면, 내가 그 사실을 끝까지 몰랐다면(제보 당시 그 제보사실은 이미 종료된 상태였다), 그래서 내가 당시 남친과 계속 만났다면, 결국 우리가 결혼을 했다면, 지금까지 내가 겪은 많은 일들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많은 것이 달라졌을텐데. 이런 생각을 정말 많이 했었다.


그런데 사실 일어나지 않은 일의 인과의 결과란 알 수가 없다. 그의 제보가 없었더라도 우리가 계속 만났을지, 내가 행복했을지는 모를 일이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한 번도 원한 적 없었던 나의 이 현실과 결부되어 '너만 아니었다면 난 지금 행복했을텐데'라는 밑도 끝도 없는 원망으로 귀결된 것은 아닐까.


이휘재의 인생극장처럼(또 한번 옛날사람 인증이요) 인생의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살아 볼 수 없어서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제보자로 인하여 내 인생이 이런 방향으로 틀어지게 된 것이 어쩌면 '차악'이었을지도, 그가 정말 나의 구원자였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회복력 강한 사람들의 세 가지 비밀'이라는 TED 강의를 본 적이 있다. 사고로 딸 아이를 잃은 강연자가 자신의 경험과 심리학 이론을 바탕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꿀팁을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내가 하는 행동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해가 되는가(Is what I am doing helping or harming me?)를 생각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재판에 가서 자신의 딸을 죽게 한 운전자의 얼굴을 볼 것인지 고민하다가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에 결국 보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나는 이게 좀 신박했다. 잘 생각해보면 모든 상황에 통용될 수 있는 말이다. 지난 명절에 다투었던 가족과 화해할 것인지, SNS에서 시간을 더 보낼지 말지, 승진이나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귀찮은데 운동을 스킵하고 조금 더 잘지, 와인을 한잔 더 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렇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를 돕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해치고 있는가? 나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결정하면 그게 정답이다. 너무나도 간명하다. 그간 고민이 될 때마다 점쟁이와 타로에 의지한 나의 시간과 돈이 아까웠다(이러고 조만간 또 간다에 만원 건다).


나는 내 인생을 기준으로 완전한 제3자인 누군가를 원망하느라 무려 6년 전 일(이 글을 쓰면서 6년이나 지났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을 지금까지 곱씹고 또 곱씹어 왔다.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 가운데 하나가 '망각'이라는데, 나는 이 선물 수령을 거부한 채 잊어 마땅할 기억을 우려내고 또 우려내고 있었다(사골곰탕 장인도 아니고 이제 그만하자).


게다가 제보가 없었던 상황을 가정하고 홀로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대며 청승을 떨고 앉아 있었던 것인데, 정말 쓰잘데기 없고 나에게 해만 되는 일이었다. ‘만약에’라는 것은 아무런 힘이 없다.


6년 만에 만난 그의 태도를 보면 그는 자신이 던진 돌에 맞아 등이 터진 개구리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않는 사이코패스이거나 아니면 머리가 나빠 아예 그 일을 잊어 버린 것 같았다. 어떤 경우이건 간에 내가 그 일을 되새기거나 신경쓸 필요가 1도 없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심지어 그에 대해 이 글을 쓰며 시간을 할애하는 것조차 무용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에 대한 원망과 6년 전 그날의 기억 모두 그곳 가평의 그 계곡물에 흘려 보내야겠다. 조금이라도 쓸데가 있다면 기억의 한조각이라도 계속 붙잡아 보겠지만 그게 아님은 자명하다. 뇌의 기억 저장소에도 용량이 정해져 있을텐데 이런 유해한 파일은 지금이라도 빨리 삭제해서 유익한 파일 저장 공간으로 활용해야겠다. 내 인생을 망치러 왔던 나의 구원자여, 잘 가라. 이젠 정말 잊어주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다시는 거기 가평 오리 먹으러 가지마. 나 또 갈거니까. 인생 오리구이 찾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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