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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May 25. 2024

어지러운 공간을 바로 잡아가며 느끼는 것들

5월 25일


1. 학교를 옮긴 뒤, 처음 과학실을 인수인계 받았을 때 너무 지저분해서 깜짝 놀랐다. 내가 가지고 있던 교실 이사 규칙은 이랬다.


- 모든 쓰레기는 버릴 것

- 쓰레기가 아니나 낡아서 다음 사람이 도저히 쓰고 싶지 않을 것은 가져가거나 버릴 것

- 가급적 상태가 좋고 새 거인 것만 남길 것

- 그 외의 공간은 대부분 깨끗하게 비워줄 것. 그 사람의 짐도 있을 것이니.     


이 원칙을 고수하면서 교실을 이사다녔는데, 정작 내가 받은 교실은 교사 개인의 짐만 뺀 그대로였다. 심지어 3개의 쓰레기통에 꽉찬 쓰레기까지...서랍을 열 때마다 모든 곳에 도저히 쓸 수 없는 짐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화가 나고 속상했다.      


학교를 옮긴 뒤라 정신이 없고 해야 할 일이 많아 스트레스가 많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것들, 하루에 할 수 있는 분량들만 아주 조금씩 치우며 3달여가 지나갔다. 솔직히 그분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 흘러 넘쳤지만, 숨을 돌리고 지금 당장 눈앞에 있는 것들을 조금씩 치우며 지내다 보니 엉망인 것들을 바로 잡는 재미가 또 있다는 것을 느꼈다.      


죽은 화분 7개를 버리고, 쓰레기통 꽉 찬 쓰레기를 비웠다. 이것 저것 쌓여 있는 창고의 박스를 버리고, 손에 잡히는 족족 버렸다. 어느 순간 눈 앞의 형상들이 꼭 내 마음 속 모습 같이 느껴졌다. 뒤죽박죽 됐던 것들을 바로 잡고, 버리며 조금씩 마음을 정돈했다. 청소라는 건 살면서 계속 해왔지만, 이번처럼 내가 어지르지 않은 커다란 실내 공간을 바로 잡아가는 건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투덜거리며 시작한 작업 속에서 나름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머문 곳은 깨끗하게 만들고 떠난다는 원칙. 그 원칙을 지키지 않는 이가 종종 있지만, 다른 이의 선택과 상관없이, 그리고 굳이 그를 비난하지 않고, 그저 나의 원칙을 잘 지켜내며 살고 싶다. 그 원칙을 지킴으로 인하여 세상의 어떤 소중한 가치들은 천연기념물처럼 보호되는 것이니까. 나는 그 가치들을 조심스레 보존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이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 자부심이 어려움들을 상쇄시켜주는 것 같다.    

 

2. 문자에 강한 딱 그만큼, 숫자에 매우 취약하다. 학교 업무를 하면서 예산을 짜는 행위는 어떤 업무이든 피할 수 없는 부분이라 힘들다. 이번에도 내가 맡은 업무에 대한 예산을 짜고, 필요 목적에 따라 예산을 나누는 일을 했다. 엑셀을 켜놓고, 만에 하나라도 틀리는 계산이 있을까 걱정하면서 조마조마하게 수식을 짰다. 역시나 1학기 초에 대강 세운 예산 계획에 구멍이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교육청으로부터 좀 더 예산을 많이 청구했어야 했는데, 3월에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대강 세우고 신청했더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 진땀이 난다. 다시금 숫자 안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예산을 아껴가며 다시금 각 항목별 예산을 세밀하게 짰다. 알뜰하게 생활한다면 별탈은 없이 흘러갈 거란 결과까지 당도한 뒤에야 안도의 한숨이 흘러 나왔다.      


마지막 합계 금액까지 다시 확인하고 엑셀을 마치는데, 내 안에 설명할 수 없는 뿌듯함이 차올랐다. 가장 못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실수 없이 해내기 위해 더듬더듬 노력하는 내가 자랑스럽단 생각이 들었다. 일의 성공 여부를 떠나 못하는 것을 잘해내고 싶은 마음 자체가 귀한 것이니까. 엑셀을 잘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엑셀을 켜고 이런 저런 수식을 짜 보고 도전하는 내가 멋있다. 또 하나의 고된 산을 잘 넘어갔다.      


3. 며칠간 꽤 침체된 나를 위해 친구가 귀한 시간 쪼개어 만나러 와주었다. 친구도 나도 건강해야 하는 사람들이니 메뉴로 샐러드를 선택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으며, 마음의 양약인 친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요즘 고민이었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펑펑 눈물을 쏟기도 했다. 고민이 생기면 누군가에게 이야기하기 보다 혼자 조용히 생각하다 흘려 보내는데,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친구가 마련해준 것이 고마웠다. 우린 사람이고, 혼자 헤쳐나가기엔 세상은 너무나 벅차다. 서로에게 의지할 어깨가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4. 처음으로 과학을 전담하여 가르치게 되면서 알게 되는 좋은 앱들과 교구들이 많다. 이번에 아이들에게 태양계를 가르치며 Solar system scope 앱을 알게 되었는데, 태양계를 잘 구현한 영상과 신비로운 음악 덕분에 아이들에게 우주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제대로 불러일으킨 거 같다. 수업 시간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열심히 탐색하다가 알게 된 이동식 현미경 또한 아이들에게 과학 과목의 특성에 대해 흥미를 느끼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교사로 살든, 어떤 직업이든 한 해 동안 내게 주어진 일이 있는 것이고, 그 주어진 땅을 성실히 파다 보면 얻게 되는 산물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산물들은 당장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도 삶에서 유형으로든, 무형으로든 내게 흔적을 남기며, 그 흔적이 쌓여 또 다른 삶으로 나를 인도한다. 그렇기에 과학 전담이란 이 소중한 기회를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수업 준비를 성실히 해내면서 아이들에게도, 나에게도 유의미한 순간을 더욱 많이 만들고 싶다.      


5. 끊임없이 읽고 쓴다. 수많은 책을 읽고, 매일 단 몇 문장이라도 글을 쓴다. 마음의 흡수, 배설 작용이 매우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다. 쌓이며, 쌓이는 것만큼 또 내보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들이 내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 거 같다. 마음의 키가 보이지 않게 조금씩 자라고 있다. 굳이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에게라도 마음의 흡수, 배설은 중요한 과정이란 생각이 든다. 말, 글, 그림, 몸의 움직임. 그 무엇이라도 우리는 무언가를 우리 마음에 받아 들이고, 그 무언가를 내보내야 한다. 그 과정이 끊임없이 이루어져야지만 영혼은 자란다. 내가 이 원리를 살아가면서 체득하고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6. 같은 학교 동료이자 좋은 친구가 된 Y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서로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기에 책에 대한 이야기도 깊게 하고, 종교가 같아서 믿는 사람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했다. 종교와 취미가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같다. 그런 의미에서 Y샘과의 만남은 특별하고 감사하다. 비슷한 세계관을 가졌으나 서로 영혼이 가진 특질 덕분에 우리는 너무나 다르다. 비슷하고 다른 우리가 만나 서로의 세계에 영향을 받고 성장하는 과정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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