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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이 Jun 14. 2024

포항 해파랑길을 무작정 걷고 있는 이유

600일의 기록


 워크샵을 위해 포항에 내려왔다. 보통 회사에서 하는 워크샵(Workshop)이 아니라, 걷기 위한 여행, 말 그대로 워크샵(Walk-shop)이라고 이름 지은 나만의 리프레시 휴가를 즐기고 있다. 회사에는 일주일간 연차를 냈다. 4박 5일간 여유롭게 포항 해파랑길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걷는 것은 나의 오래된 마음 정리 기술이다. 나는 답답한 일을 마주하거나 풀리지 않는 고민이 있으면 무작정 걷으며 힌트를 얻는다. 출퇴근 길이든, 동네 산책로든 무작정 걷는다. 1시간에서 2시간가량 길을 걷는다. 걷는 내내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찾고 고민하던 문제의 힌트를 얻곤 한다.



 나의 걷기 여정은 10년 주기로 굵직한 사건이 있었다. 10대 때는 경기도에서 충청도까지 걸었고, 20대 때는 전국 일주를 하며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두 발로 누볐다. 30대에는 유럽을 걸었고, 40을 바라보는 지금은 포항을 걷고 있다. 나는 그렇게 걸으며 인생의 고비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다. 걷기가 나를 살리고, 내게 더욱 높은 사고를 선물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마음이 복잡할 땐, 일상을 떠나 생소한 장소에서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다. 평소와 다른 가로수, 처음 보는 새들,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공기나 소리들. 그런 것들이 일상에 지친 마음에 활기를 불어 넣어준다.



 걷기로 생각을 정리한다고 하면 자칫 거창해 보일지도 모른다. ‘걷기를 통해 깨달음을 얻는 다던가, 숭고한 고난의 여정을 겪는다던가, 대자연을 마주치거나, 굶주리고 피폐해 거의 죽기 직전까지 자신을 몰아붙인다던가’ 하는 그런 엄청난 일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거창한 일들을 하기 위해 겪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운이 좋다면 그런 경험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내가 걷는 궁극적 목적은 그게 아니다. 나는 그저 걷기를 통해 몸의 에너지를 소진하고, 다시 충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일종의 디톡스라고 볼 수도 있겠다.



 몸 안에 있는 에너지를 모두 소모할 때까지 걷는 거다. 그렇게 몸을 피곤하게 만듦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은 두 가지다. 첫째는 ‘잡생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몸이 피곤하면 불필요한 생각은 우리 머릿속 우선순위에서 멀어진다. 당장에 필요한 생각, 단 하나의 가치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현재 당면한 최고의 문제에 깊이 빠져들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이득은 ‘몸이 생존 모드로 바뀐다는 것’이다. 우리 몸은 체내 에너지가 고갈되면, 생존 모드로 변한다. 일상에서는 몸속 깊이 잠들어 있던 세포들이 하나씩 눈을 뜬다. 따라서 몸은 지쳐가지만 반대로 몸속에서는 뜨거운 것이 올라와 더 활기를 만들고 몸이 제대로 굴러가게 만든다. 생존 세포는 머리를 좀 더 효과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힘이 있다. 평소와는 다른 시각으로 문제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고민에 대한 힌트를 얻게 된다.





 걷는 것 자체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을 걷든 유럽을 걷든, 서울을 걷든 포항을 걷든. 세상의 길은 대부분 비슷하게 생겼다. 다름이 있다면, 특별함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지금 어떤 마음을 갖고, 어떤 생각을 하며 그 길 위에 서 있는가’를 인식할 줄 안다면 우리는 특별해질 수 있다.



 지금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눈이 필요하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근육통으로 온몸이 쑤시는 몸, 그 몸의 주인이 누구이며, 그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아차리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이 내가 추천하는 걷기의 기술이다. 나 자신을 오롯이 느끼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걷는 이유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일상에 지치는 날이 찾아온다. 모든 걸 내려놓고 그만두고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만약 여러분에게 그런 시기가 온다면, 나는 긴 시간, 무작정 걸어보는 걸 추천한다. 지금 살고 있는 곳과는 전혀 다른 지역을 찾아가 그냥 무작정 걸어보도록 하자.



 멋진 자연 경관이 있는 둘레길도 좋고, 빌딩과 시내버스로 복작스러운 시내도 좋다. 어디든 괜찮다. 평소 생활 반경에서 10km만 떨어진 곳을 방문해도 풍경이 달라진다. 그런 풍경을 보며 걷는 거다. 일상과 다른 새로움을 느껴보는 거다.



 그리고 거기에 우리 몸의 에너지와 고민을 모두 펼쳐 놓아보자. 그러면 우리는 텅 빈 상태가 된다. 모두 내려놓아 텅 빈 그 공간에, 차근차근 천천히 새로움을 채워 넣어보자. 하나씩 내려놓고 채워놓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분명 어느새 힌트가 우리 옆에 와 있을 것이다.






오제이의 <사는 게 기록> 블로그를 방문해 더 많은 아티클을 만나보세요.

https://blog.naver.com/abovethesurf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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