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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제이 Jun 18. 2024

난세기와 탈수

600일의 기록


 최근 본 〈삼체〉라는 드라마에는 ‘항세기’와 ‘난세기’라는 말이 나온다. 항세기는 살아가는 데 적합한 시기라는 뜻이고, 난세기는 그와 반대로 생존하기 힘든 시기라는 뜻이다. 드라마 속 삼체인들은 항세기에는 기술을 발전시켜 문명의 꽃을 피우고, 난세기에는 일명 ‘탈수’라는 기능을 활용해 온몸의 수분을 빼 종이처럼 마른 상태로 변해, 항세기가 돌아올 때까지 버틴다.



 아내와 나는 그 말이 참 재밌어서 일상에서 자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 가정에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난세기라고 표현하고 웃는다. 반대로 가벼운 문제나 재밌는 일이 생기면 항세기라고 말하며 또 웃고 즐긴다. ‘고난’, ‘문제’라고 표현했다면 다소 힘이 빠지고 걱정이 앞섰을 텐데, 항세기와 난세기로 표현하니 한결 가볍게 느껴져 쉽게 극복하게 된다.



 얼마 전 포항 여행에서 해파랑 길을 걸을 때도 그랬다. 우리 여행의 목적은 해안 도로를 걷는 도전이었다. 도전을 시작한 첫날, 우리는 시작부터 난세기를 맞았다. 파도가 둘레길까지 들이치는 탓에, 마치 곡예사가 불로 된 고리를 뛰어넘듯 파도가 들이치는 타이밍을 계산하며 길을 헤쳐나가야 했다. 우리는 파도가 들이치지 않는 길은 항세기라고 불렀고, 파도가 들이치는 길은 난세기라고 부르기로 했다. 항세기와 난세기를 번갈아가며(거의 전부 난세기였지만) 한 코스씩 돌파해 나갔다. 정말 심한 난세기일 경우에는 우회 도로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 우회 도로 역시 또 다른 난세기이기도 했다. 수많은 난세기를 지나 결국 우리는 목표했던 코스를 완주했다. 그리고 뒤늦게 안 사실인데, 우리의 첫날이 유독 파도가 거친 날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냐면, 그날 이후의 모든 날들은 파도가 잔잔해 걷기 좋은 날들이었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수많은 난세기를 만나게 된다. 전셋집 주인이 위장전입을 요구한다거나, 좋은 성과를 내고도 인사고과가 엉망으로 나온다거나, 프로젝트 리더가 오픈을 코앞에 두고 도망간다거나 하는 등 예측할 수 없는 고난을 겪게 된다. 그럼 그때마다 그저 ‘난세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계산할 수는 없지만 항세기는 반드시 돌아오므로, 그때까지 ‘탈수’, 즉 존버를 하면 될 일이다.



 고난과 시련을 재밌는 단어로 치환해 사용하면, 그 무게감이나 고통이 반감되는 기분이 든다. 게다가 그 치환한 단어가 결국 해결로 이어지는 단어라면, 우리가 당면한 문제 역시 결국 해결될 거라는 기대감이 들어 안심되기도 한다. ‘문제’라는 건 어떤 태도로 맞이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진다.



 나는 사실 지금 수 년째 난세기를 겪고 있다. 그럼에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합리화하는 게 아니다. ‘될 대로 되라지’라는 태도로 방관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이것은 난세기일 뿐이며, 곧 지나갈 것이고, 이 난세기는 나의 삶에, 나의 존재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것이란 걸 아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라 봐야 ‘조금 후진 옷을 입고 맛없는 음식을 먹는 것’일뿐이다. 그 정도 난세기쯤은 수 백 번도 버틸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난세기를 겪는 와중에도 자신감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생산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아서다. 나는 늘 무언가 만들어낸다. 항상 뭔가를 하고 있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세상에 선물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것의 힘을 믿는다. 언젠가 결국 이 난세기가 끝났을 때, 나의 세상에 항세기가 찾아오는 그 순간, 내가 준비한 선물들은 새로 시작된 항세기 문명에 싹을 틔우는 씨앗이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멈출 수가 없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8톤 트럭...이라고 하면 좀 부정적인 느낌이니까, 브레이크가 없는 스포츠카라고 하자. 애초에 멈추는 기능이 없는 거다. 속도만 조절할 뿐 계속 전진한다. 그것이 나의 탈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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