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가끔 부끄러움에 어디론가 숨고 싶어진다. 그간 내가 벌여온 다양한 시답잖은 일을 보며, 그 어설픔과 불완전함에 손발이 오그라들어 모조리 회수하고 싶은 마음이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낸 것 없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도전'이라는 미명을 뒤집어쓴 '가짜 열심' 때문에, 부끄러움은 시간을 먹고 점점 자라나 이제는 나의 자의식을 집어삼키고도 남을 만큼 비대해져버렸다.
이대로 모든 곳에서 발을 빼고 다시 10년 전의 보통 인간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수시로 머릿속에 떠오르지만, 그러려면 기억을 지우는 플래시가 필요할 정도로 나는 이미 너무 멀리까지 왔다.
이제는 어떠한 위로도 차가워진 이 마음을 뜨뜻미지근하게 만들어줄 수 없는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구태여 내 마음에 꼭 맞는 위로를 찾으려 애써 방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마치 <오즈의 마법사>가 주는 '이미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어'라는 교훈이 내 삶에도 남아있다고 믿고 싶은 처절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 되뇌어 본다.
나는 지금 영락없이 실패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길거리 방황하는 부랑자의 모습을 보며 그들과 나의 삶을 저울질해 본다. 어쩌면 그들이 더 자유롭고 쾌활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아침에는 이런 사람을 보았다.
종로 3가의 파고다 공원의 왕복 6차로 사거리에서, 신호와 차선을 무시한 채 역주하며 수레를 끌고 있는 남루한 차림의 아저씨가 있었다. 수많은 차들이 그의 수레 앞에 절하듯 멈춰 섰는데, 버스 밖에 보이는 그 기백이 흥미로워 나는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물 위를 걷는 예수라도 되는 것처럼 당당히 걸었다. 매섭게 달리는 자동차 사이에 느려터진 수레를 밀어 넣으며 시종일관 여유롭게 움직였다. 가만히 보니 그의 수레가 위협적이어서 자동차들이 멈추거나 길을 터주는 게 아니었다. 그는 종로 3가의 신호체계를 마스터했고, 어느 순간이 안전한 시점인지 이미 훤히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사람이라도 신호를 위반한다면 그 사람은 큰 사고를 당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가 자신의 목숨을 귀하게 여긴 탓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사람 역시 그 소중한 목숨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처럼 사는 게 맞는 것일까?
그의 기막힌 행각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그는 청계천 삼일 대교 위까지 수레를 끌고 가더니, 한 쪽에 가지런히 수레를 주차해두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침 체조 한마당. 나는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건지 두 눈을 의심했다.
세상에서 가장 게으를 것 같은 차림을 한 사내가, 이 시대의 가난의 상징과도 같은 폐지 줍는 수레를 끌고, 목숨을 내놓은 채 교차로를 건너 온 다음, 누구보다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몸짓으로, 자신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아침 루틴을 실행하는 것을 보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난감해졌다.
그리고 나를 더욱 곤란하게 만든 것은 그런 모습에서 나의 삶이 겹쳐져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이, 저 남루한 사내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온 세상에 검은 빗줄기가 쏙아지며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마치 유리 상자 속에서 힘차게 쳇바퀴를 돌리던 햄스터가 밤낮으로 일궈낸 자신의 근면 성실함이 실제 세상에서는 어떤 생산적 일에도 쓰이지 못하는 그저 주인의 유희 거리임을 눈치챈 것과도 엇비슷했다.
그러나 그 비통함을 눈치챈 햄스터에게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는 앞으로 유리 상자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감내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 이중고 속에 햄스터는 여전히 쳇바퀴를 굴리는 동료 햄스터를 바라보며 오히려 저 때가 나았음을, 그러나 이제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음을 되뇌게 됐는데, 그때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기억을 지우는 플래시였다.
햄스터로서의 삶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품고 현실을 무너뜨릴 계획을 품을 것인지. 이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선 나를 보며 한 가지를 깨달았는데, 수레 끄는 남루한 이가 나보다 잘난 점이 있다면 그는 분명한 선택을 내렸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와 같이 결단을 내릴 수 있을까. 나는 그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양 극의 반대편, 즉 내가 꿈꾸는 저편은 아직 그 실체를 내 두 눈으로 본 적이 없어, 어떤 삶인지 막연하고 까마득하기만 하다.
꿈에서 깨어야 할까. 계속 꿈을 꾸어야 할까. 아직 답을 얻지 못한 채, 나는 다시 빌딩 안으로 몸을 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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