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워야 해서

1부 흙이 말이 되는 시간

by 이미사

“구워서 전시해 보죠.”


그 말이 들어오자,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의가 끝나고
담담하게 나는 자리에 앉아 사진을 넘겼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수업의 공기가 다시 펼쳐졌다.


귓가에 아이들의 소리가 붙어오는 것 같았다.


흙이 무너지는 걸 버티던 몸짓,

입을 꾹 다문 표정,
진흙이 잔뜩 묻은 손.


단추를 들여다보던 얼굴들,
커다란 흙덩이를 안고 있던 모습,
난장판이 된 자리까지.


나는 머리를 한번 흔들고,
다시 보았다.


그리고 구워낼 만한 것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없었다.


사실 내가 찾고 싶었던 건
‘전시할 것’이 아니라
‘내가 굽는 이유’였다.


그리고 아이들의 작품을 굽는 문제도
내겐 따로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구워야 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말을 붙이면
조금 편해질 것 같았지만,
그 말로는 덜어지지 않는 게 있었다.


이곳에는 작은 가마 하나가 있었다.
아주 간혹 구워낼 만한 것이 생기면
한두 작품 정도를 구웠다.


나는 그 가마를 거의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이걸 써야 했다.


갑자기 답답한 감정이 뛰쳐 올라왔다.


실컷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며
만들어 온 수업의 성격을,
이제 와서 바꾸어야 하다니.


전시를 위한 수업을 해보는 것도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나쁘지 않다’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아이들은
‘굽는 조건을 맞춘’ 상태로
흙을 만져야 한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나는 아직 마음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굽는 것을 전제로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이 있다는 것도,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러지 말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 변화는 아이들에게도 갑작스러운 일이다.


어제까지 자유롭게 흙을 경험하던 아이들이
“왜 갑자기 선생님이 달라지셨지?”
하고 느낄 게 뻔했다.


물론 방법은 있다.


전시에 대한 멋진 풍경을 말해주는 것.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작품을 보여주는 기회라고
설득하는 것.


그러면 아이들은 먼저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다.


엄마, 아빠에게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 마음에 기대어,
아이들의 “그래요”를 핑계 삼아
나는 굽는 것에 대한 면죄부를 얻을 수 있다.


‘아이들이 원했잖아.’


그러면 나는 편해진다.
너무 편해진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그동안 내가 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흙은,
어떻게 되지.


따지고 보면
흙을 다루면 굽는 건
당연한 수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조차도
“그러지 말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구웠을 때의 결과물이
말라버린 흙보다 나은 것도 사실이다.


색을 넣고 유약을 바르면
흙이 멋진 단장을 하게 되는 것도 맞다.


그런데도 나는
왜 굽는 것 앞에서 이렇게 예민할까.


아이들이 나 때문에
멋지게 전시할 기회를 버리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실은 내가
내 작업 앞에 섰을 때보다 더.


환경 생각도 했다.


연습하듯 도자기를 구워내는 일이
좋지 않다는 생각.


빗살무늬토기가 아직도 남아 있지 않은가.
도자기는 분해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나를 설득하려고
다른 이유들을 끌어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도…
핑계일 수 있다.


내가 진짜 예민한 건,
굽게 되면 더 이상
흙을 놀이하듯 만지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굽는 데는 조건이 필요하다.


그러면
아이들의 자유가 사라질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나는 이런 질문을
내게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나를 건드리는 걸 싫어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누군가, 혹은 환경이 나를 만들어버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아놓고
그것을 내 것이라고 말하게 되는 것.


그게 너무 어려웠다.


내가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건,
사실 내게 해주고 싶었던 환경이었다.


그런데 그래서
나는 뭘 얻었지.


오랜 시간의 멈칫거림 속에
결과물도 없이 고민만 잔뜩 쌓였는데,


이걸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건가.


아니다.
그건 정말 아니다.


물론 내가 흙놀이를 좋아한 건
자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흙은 내면을 끌어올리는 능력을 가진 재료다.


학습된 자신을 보는 게 아니다.
원래 지닌 모습을 드러나게 한다.


나는 그걸 위해
자유가 필요했다.


설사 그게 난장판이 되더라도.


여기서 아이들에게
결과물이 가장 중요한 건 아니다.


어릴 때는
충분히 잘 노는 것이 필요하다.


그 안에서
아이들은 배운다.


하지만 아이들도 자란다.


욕구도 자란다.


다른 이에게 잘 보이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자기 자신에게도.


게다가
시각적 기준은 생각보다 이르게 생긴다.


그러면 나도 준비해야 하는 걸까.
조금씩.


그러면
내 문제는 뭐지.


나는 자유가 보장되면
내 작업이 저절로 잘될 거라고 믿었던 걸까.


처음에 작업이 멈칫했을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구속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본능을 다시 깨우고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것 같다.


과정일 뿐인 것이
목적이 되어
내 생각을 고정시켜 버린 것 같다.


내가 정말 바란 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나에게 핑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아이들이
갑자기 ‘배워야 한다’는 말 앞에서
숨 쉴 틈을 갖길 바랐다.


그러면 아이들이 자라며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다스릴 줄 아는
어른이 될 거라고 믿는다.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흙은 내가 만지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흙의 가소성은
물질의 특성이기도 했지만,


흙 자체의 속성도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내 생각의 변화만큼,
머무르는 모든 순간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 오랜 시간을.


그래서 흙을
대지의 어머니의 품이라고
말하는 걸까.


나는 아이들을
진정 위하고 바라면,
그것이 나에게도
답으로 돌아온다는 걸 느꼈다.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한다.


그러면
내 마음도 움직인다.


이제
구울 수 있으면서도
흙을 만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몇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런데 한 가지가 걸렸다.


내가 어디까지 개입할 것인가.


나는 답을 내리기보다
질문을 잃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일단은 역할을 나누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은 흙의 자유를 잃지 않게,
가마는 조건을 말하게.


나는 그 사이에서
질문을 붙잡는 사람으로.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