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커리어의 변환점에서 있어서
흔히들 하는 이야기가 있다.
'마의 3년/5년/7년차'.
개인적으로 징크스, 혹은 운세와 같은
일종의 '결국 이럴거다'식의 이야기들을
그다지 달가워하지는 않는 편이지만,
어쩌다 보니 나 또한 꼼짝없이 '3년차' 샘플에
속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빅데이터 앞에 장사없는 것일지도.
나는 지난 2-3년간, 커뮤니티 부분에서
MAU로는 TOP 5 안에 드는 서비스에서
서비스 기획자로 일했으며,
연초에는 좋은 기회를 통해
새로운 도메인 도전하여
약 2달 전부터 이커머스 쪽에서 일하고 있다.
새로운 도메인 관련해서 글을 쓰기에는
아직 경험과 지식이 많이 부족하므로,
언제나 그래왔듯 인생의 변화가 찾아오는 시점에
나 자신을 정비하고, 기록하기 위한
글을 써보려 한다.
기록은 크게 5가지로 나누어 쓴다:
1. 왜 변경했나
2. 커뮤니티 기획자로서의 경험
3. 왜 하필 커머스인가
4. 왜 지금인가
5. 그래서 만족하는가
모든 주니어 기획자들이 한 번씩 하는 고민이 있다.
'기획자로서 나는 어떠한 전문성을 가져갈 것인가?'
기획자는 알다시피 한국 IT업계에서
상당히 특이한 포지션을 가지고 있다.
"서비스 기획자, PM, PO" 등등
기업에서 요구하는 롤에 따라
명칭도 다양하게 불리고 있으며,
업무 scope도 각양각색이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주변 주니어 기획자들을 보면,
누군가는 코딩을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고,
누군가는 디자인 툴을 잘 다루는 등,
여러가지로 자신만의 강점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 꽤 많은 것 같다.
과거에는 나도 커리어에 대한 고민 때문에
위와 같은 다양한 시도를 해보기도 했으나
이들도 결국 일종의 스킬 셋에 불과하며,
실제 현업에서 정의하는 '좋은 기획자의 역량'과는
다소 연관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스킬 셋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님)
기획자 3년 차가 되었을 때 즈음,
'기획자에게 있어 전문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나는 그 답을
'도메인에 대한 깊은 지식과 사용자 경험'
이라고 정의했다.
주변의 비슷한 연차의 개발자, 디자이너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들 역시 이직에 대한 고민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
그들은 상대적으로 도메인 변경에 대해서
큰 부담이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메인이 바뀌더라도 자신들이 하는 업무가
그리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서버 개발자는 도메인을 바꿔도
서버 개발을 잘하면 되고,
디자이너는 새로운 도메인에서도
디자인을 잘하면 된다.
(금융 쪽은 법적인 이슈가 엮여있어 조금 다르지만)
하지만 기획자의 경우는 케이스가 다르다.
기획자는 서비스를 기획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크고 작은 방향성들을 제시하고,
서비스 지표를 올리며 사용성을 개선하기 위해
필요한 프로젝트들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함께 협업하는 동료들을 설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산업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과,
사업 BM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필요로 하고,
경쟁사들의 동향 및 강점과 약점들을 파악하면서
실제 사용자들은 어떠한 패턴으로,
어떻게 서비스들을 소비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는다고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지식들이 아니다.
데스크 리서치를 통해 겉핥기로 배울 수 있더라도,
실제 내 서비스를 유의미하게
개선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사용자들을
그 누구보다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결국 직접 겪어보고 부딪혀보며,
사용자들과 살을 오래 맞대어봐야만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기획자로서
이커머스 도메인에 대한 전문성을 장기적으로
깊게 쌓고 싶어 도메인 변경을 결심했다.
커뮤니티 서비스의 매력
나는 내가 기획자로서의 첫 커리어를
커뮤니티 서비스로 시작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커뮤니티 서비스의 본질이
지독히도 '사람'에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만의 관심사와 니즈에 따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은
인류의 가장 기본적이고 오래된 니즈 중 하나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킨다는 것.
그리고 그 수 없이 많고 다양한 연결이,
내가 동료들과 함께 만드는
서비스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것.
그렇게 이루어진 연결들이 우리의 손을 넘어서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경험, 새로운 가치들을
만들어 나간다는 것을 상상해보면
이는 프로덕트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분명 가슴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커뮤니티 서비스를 담당하며
유저들의 패턴을 살펴보다 보면,
'인간에 대한 공부'를 간접적으로
할 수 있어 즐거웠다.
커뮤니티를 직접 만드는 사람들은
전체 유저들 중 몇 %나 되는지,
그리고 실제로 커뮤니티를
지속적으로 잘 이끌어가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수 없이 많고 다양한 커뮤니티들 중
어떤 커뮤니티들이 잘 굴러가는지,
사람들은 보통 어떤 주제에 관심 있어하는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지나가는 유행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생각지도 못한 목적으로도
온라인 공간은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 등등.
커뮤니티 서비스 기획자는
인간 개인과 인간 단체를 모두 면밀하게 살펴보고
그들을 배울 수 있다는
커다란 장점 및 매력을 가지고 있다.
데이터와 친해질 수 있었던 행운
나는 원래 데이터 기반으로 문제점을 발견하고
서비스를 개선해 나가는 것에 관심이 많았는데,
다행히도 신입 시절부터
상당히 데이터 드리븐한 조직에 속해 있었다.
(이는 커뮤니티 서비스와는 별개로, 내가 운이 좋았던 편)
다만 사내 데이터 조회 툴이
내부 고객들만을 위해 만들어져 있다 보니,
툴을 자유롭게 다루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고,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금방 까먹기 쉬워
툴에 능숙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자세하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흙탕에 몸을 던져버리듯 자진해서
주기적으로 서비스 데이터 보고를 하는 업무를 맡았다.
처음에는 뚝딱거리며
업무 시간의 상당 부분을 바쳐야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팀에서
툴을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 되었으며,
자연스레 데이터와 관련된 다양한 업무들이
대부분 내게 몰리게 되었다.
데이터 툴을 어느정도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되니,
평소에 가지고 있던 궁금증들을
바로바로 툴에서 조회해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서비스와 관련된 데이터를 많이 살펴보다 보면,
평소에는 알 수 없었던
사용자 패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예를 들면 1년 동안 어느 시즌에는
어떤 지표들이 오르고 내리는지,
특정 지표가 오를 때
다른 지표들은 어떤 영향을 받는지,
어떤 화면에 랜딩한 사용자들의
특정 액션 전환율은 몇 %인지,
어떤 푸쉬 알림에 유저들이 잘 반응하는지 등등.
자연스레 탑 다운으로 내려오는 과제들 외에도,
내가 살펴본 데이터를 기반으로
바텀 업으로 개선 과제를 올려서
실제로 몇몇 프로젝트들을 담당해
개선을 진행하기도 했다.
데이터에 기반하여 개선 방안을 설계하고,
프로젝트 출시 후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자 데이터를 살펴보며
객관적으로 프로젝트를 평가하고
계속해서 개선해나가는 것.
주니어 기획자로서, 이 부분은 내게
참 많은 도움이 됐었던 것 같다.
막연한 열망
아주 어렸을 적에, 외할머니 손에 잠시 자랐었다.
당시 외할머니는 작은 옷가게를 하셨는데,
할머니는 종종 가게에 들어온 손님들과
스몰톡을 하시며 그들에게 어울리는 옷들을
추천해주시고는 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호호호 웃으며 지갑을 열었고,
할머니가 추천해주신 옷들을 들고는
기분 좋게 문을 나서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었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니즈를 파악하고 가치를 선사하면서,
이를 통해 실제 재화가 오고 간다는 것이
내게는 매우 역동적이고 흥미롭게 느껴졌다.
대학생 때도 막연하게 커머스 분야에서
업무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커리어의 첫 시작은 커뮤니티 서비스로 시작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커머스 쪽에서 일을 할 것이라는
나름의 중단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 더 데이터에 가까워지고 싶어서
모든 서비스가 그렇겠지만,
항상 데이터, 지표만을 바라보고
서비스를 기획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서비스를 개선하고 나면
단기적으로는 지표가 오르지만,
시간을 어느정도 두고 지켜보면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거나
기존보다 지표가 더 안 좋게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는 편이다.
또한 특정 지표만을 올리기 위해
화면이나 flow를 설계하면,
출시 후 기획자가 목표했던 지표는 오를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다른 지표들이 악영향을 받을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사용성이 떨어져
사용자들이 이탈하게 될 수도 있다.
따라서 나는 모든 의사결정을 데이터에만 기반하면
안 된다는 점을 일찍이 깨달았다.
커뮤니티 서비스는 다른 SNS 서비스들과 달리
조금 더 독특하고 기획하기가 어려운 것이,
서비스의 중심이 '개인'이 아닌
'모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커뮤니티 서비스 기획자는
개인을 위한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가 잘 굴러갈 수 있도록
그 판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1차원적으로 생각해보면,
정작 기획자가 설계하는 화면이나 플로우는
서비스를 사용하는 개인 유저를 위한 것들이다.
반면에 모임을 만드는 것도,
가입하고 참여/활동하는 것도
유저 개인의 영역이지만,
정작 커뮤니티 개설이나 가입을 많이 유도해도,
실제로 모임이 잘 굴러가도록 하는 것은
단순 참여자 몇 명이 노력한다고 되는 영역이 아니다.
또한 모임에서는 개설과 가입 후
그 안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성되는
컨텐츠 및 이벤트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는 기획자의 통제 영역
밖에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애초에 커뮤니티 특성상, 서비스 외에도
다양한 외부 요인들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도 한몫한다.
'사람'과 '모임'이 워낙 중요한 것이
커뮤니티 서비스이다 보니,
내부에서 의사 결정을 할 때에는
사용자 데이터보다 과거의 경험이나
기획자의 촉/감, 혹은 주변 의견 등
정성적인 부분에 의존하는 부분도 상당히 많았다.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우선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다.
아무튼 명확한 것을 선호하고
예측/통제를 좋아하는 내 성향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모임'이라는 개념보다는,
자연스럽게 '상품'이라는 실체가 있고,
숫자로 명확하게 표현되는 '돈'과 '거래가' 있으며,
사용자들이 '구매 및 탐색'이라는
확실한 니즈를 가지고 서비스를 사용하는
이커머스 도메인에 더 끌렸던 것 같다.
(사용자가 상품을 구매하고 나면 해당 상품을
꾸준히 잘 사용하도록 유지해줄 필요가 없다)
시기에 대해서는 답이 비교적 간단하다.
나는 애초에 이커머스 쪽에 관심이 있었으며,
내게는 '무엇'이나 '왜'가 아닌
'언제'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한 서비스를 2-3년 정도 맡으면서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약 50-60개를 진행했다.
많이 뚝딱 거리면서 정말 치열하게 일했던 것 같다.
훌륭한 선배들과 동료들 곁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서비스에 대한 이해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자연스레 바텀 업으로 올렸던 과제들도 많아졌고
해당 과제들이 좋은 성과를 보였다.
협업자들과의 합도 잘 맞춰지면서
같은 결과를 이뤄내기 위해서
예전보다는 절대적 시간과 노력이 적게 들어갔다.
자연스레 일 외의 삶에도 시간을 쏟을 수 있었고
여러모로 만족도가 높았지만,
마음 한 켠에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러닝 커브가
1-2년차 때 보다 더뎌지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같은 3년 차인데 이커머스 도메인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기획자와
이후에 도메인을 새로 막 변경한 나와의
역량 차이는 분명할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따라잡아야 하는
간극은 더욱 벌어질 것이 뻔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커뮤니티 도메인에서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고
만족할 만큼의 경험을 충분히 쌓았다고 생각했고,
도메인을 바꾸기가 비교적 유연한
주니어 연차이면서,
다른 도메인 베이스가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의 장점이 퇴색되기 전인
바로 지금이 적절한 시기라고 판단했다.
정답부터 말하면, Yes 다.
(두 달 밖에 안 됐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이커머스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부하는 것도 재밌지만,
서비스에서 내가 맡은 파트도 기획자로서
나름의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이다 보니
Challenging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만족스럽다.
무엇보다, 일하는 것이 전 보다도 더 즐거워졌다.
일단 일이 재밌으면 반은 성공했다고 보고 있다.
3-4년 차 기획자이지만,
신입의 마음으로 열심히 성장해 나가야겠다.
모르던 것들을 새롭게 배우는 것.
색다른 Challenge들을 겪고 극복해내는 것.
새롭게 시작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실로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