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현대사 속 우리들의 이야기(3)
"나도 고등학교 보내주소, 엄마!"
며칠 째인지 모른다. 사정사정해도 안 먹히니까 큰언니는 나름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떼쓰기. 그러나 어머니는 7남매를 키운 육아의 베테랑, 떼쯤은 발가락의 때로도 여기지 않았다. 큰언니는 떼 카드가 먹히지 않자 다음 온힘을 모아 장풍으로 발악 카드를 날렸다.
"나보다 공부 못헌 희자도 간단디, 왜 나는 고등학교를 안 보내주능가?"
발악은 결코 현명한 카드가 아니었다. 언니 진은 다 빠졌는데 어머니는 흔들림이 없었다. 역시, 문여사의 내공은 장난이 아니다. 귀 막고 삼 년, 눈 감고 삼 년, 시집살이로 단련된 어머니는 묵묵히 제 일을 하다가 떼와 발악이 불감당이다 싶으면 마지막 전술 '삼십육계줄행랑'으로 호미를 들고 밭으로 가버렸다.
내공이 높은 어머니의 도력을 간파한 큰언니는 급기야 마지막 히든카드를 꺼냈다. 단식투쟁. 결사항전의 의지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일주일 굶었나? 잘 모르겠으나 입학 원서 마감일이 지나자 승패는 싱겁게 끝이 났다.
어머니의 완승이었다. 큰언니는 이불 속에서 펑펑 울며
"희자는 좋겄다. 희자는 좋겄다.“
했지만 점점 웅얼거림이 목 안으로 기어들어갔고, 눈은 하루하루 맹해져 갔다. 그런데 승자인 어머니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눈만 뜨면 밭으로 나가 김을 맸다.
큰언니는 공부만 잘하면 가난해도 고등학교 보내줄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돈 벌어 동생들 공부도 시키고
빠마에 빼딱구두(하이힐) 신은 이쁜 도시언니도 되려고 했으나 큰언니의 꿈은 그렇게 가난과 주렁주렁 달린 동생들 때문에 글러버렸던 것이었다.
그즈음인 1975년, 불과 50여년 전 기록을 보자.
대한민국 여성 진학률은 중학교 67.0%, 고등학교 35.8%, 대학(교) 4.1%였다. 58년 개띠 전후 태어난 우리의 큰 언니들은 대학은커녕 고등학교 진학하는 숫자조차 10명 중 3~4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랬던 대한민국은 2008년 기준으로 84.8%가 대학에 진학한다. 아들딸 차별이 없이.
(참고 : 김재인, <여성교육과 여성의 지위변화>,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설이 되면 시골에서는 구경 못한 때깔에 것들이 쏟아졌다. 동네 엄마들 옷들이 갑자기 여름꽃보다 화려해지는 것도 설, 추석 무렵이었다. 서울이나 부산으로 간 언니 오빠들이 바리바리 사들고 온 선물 때문이었다.
신기한 이야기들도 쏟아졌다.
“야, 서울은 꼭지만 돌리면 물이 나오는디, 그 물에 세수만 해도 얼굴이 하얘진단다.”
새까맣던 금순이 언니가 얼굴이 하얘서 돌아온 이유를 듣고 우리는 도시를 동경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한 없이 유혹적인 것은 단연 종합선물세트에 든 과자였다. 어머니가 만든 조청이나 엿으로는 도저히 낼 수 없는 달콤한 맛, 언니들이 갔다는 서울, 부산에는 이런 맛과 향을 내는 것들이 널려있단다.
“야, 글먼 언니들은 맨날 이 맛있는 걸 먹는다 거 아니여?”
도시만 가면 맨지르한 삶이 저절로 펴쳐질 줄 알았던 그때는 몰랐다. 큰언니가 어떻게 번 돈으로 산 것인지.
1970년대까지 대한민국 노동시간은 살인적이었다. 1958년 섬유공장 노동자들은 평균 12시간 이상 교대제 근무를 했다. 1960년대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주당 노동시간은 55시간이었는데, 세계최장시간이었으며, 선진국 40시간보다 무려 15시간 더 길었다. 노동시간이 점차 줄어든 것은 1988년 이후, 1989년 주당 노동시간은 46시간이었고, 주40시간이 정착된 것은 2003년 근로기준법을 개정하고 난 후이다. (참고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노동시간))
노동관계 4개 기본법은 1953년 제정됐다. 하지만 기초적인 1일8시간 근무, 현실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다.
동네 큰언니들은 환기도 잘 안 되는 공장에서 하루 10시간 넘게 신발바닥에 접착제를 바르거나 섬유공장에서 펄펄 끊는 독한 약품에 염색을 하거나 미싱을 돌려 번 돈으로 화려한 도시의 선물을 사서 '금의환향'했다는 것을 커서야 알았다.
“쩌기 간뎃몰(中村) 언니 하나가 공장 다니다가 죽을병이 걸려서 내려왔대.”
도시로 갔다가 가끔 하얀 얼굴에 야리야리해져서 내려오는 언니들이 있었다. 차돌로 아무리 문질러도 하얘지지 않았던 피부를 가진 우리 촌년들은 하얀 언니가 부럽기만 했는데, 그 언니가 얼굴이 창백했던 것은 폐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섬유공장, 봉제공장에서 가장 흔하게 당하는 산업재해였다.
큰언니가 중학교를 마치고 도시로 간 나이는, 불과 16세였다.
그때는 그랬다. 사람보다 수출액이 중요해 사람을 기계보다 매몰차게 부려 먹었다. 온몸을 갈아 넣어야 하는 일터에 영혼은 숨도 쉬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인권, 노동자의 권리, 산업재해보상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 유명한 58년 개띠입니다.”
이렇게 자기소개를 하는 58년 개띠는 베이비붐세대의 다른 이름이다. 58년 개띠해에는 한 해에 100만 명가량이 태어났다. 우리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인구집단이다. 지역에서 열리는 강좌에 강의를 하러 가면 대개 58년을 기준으로 앞으로 10년, 뒤로 10년이 주류를 이룬다. 이 세대는 정말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열심이고, 성실하며, 리액션이 좋다. ‘야단법석’의 유래, ‘이판사판’의 뜻 같은 작은 앎에도 '아!" 하며 감탄한다. '이렇게 배울 데가 많고, 이렇게 살기 좋아진' 대한민국에 감격한다.
이 큰언니들은 손이 완전 여물기 전에 일터로 나갔기 때문에 배움에 대한 한이 한 자락씩 있고, 그 열망으로 목말랐던 세대들이다. 또 온몸으로 헤쳐 나가야 했던 척박한 운명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딸들도 악착같이 교육을 시킨, 아들 딸을 차별하지 않기 시작한 세대이기도 하다.
20세기 대한민국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의 노동을 당위처럼 받아들이고 살다가 노년기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58년 개띠 큰언니들. 모두가 21세기 대한민국이 만들어낸 풍요 속에 복된 날들을 오래도록 누리길 기원한다. 지난 20세기에 가슴 먹먹하고, 고단했던 날들을 보상받기를 바란다.
그런데, 한 가지는 개띠 언니들 모두가 꼭 알았으면 한다. 1948년 생 전태일은 58년 개띠들과 그 언저리의 소녀들이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장시간 노동으로 시달리면서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며 폐에 먼지가 쌓여 창백해져 가는 모습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한다. 1970년 11월,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던 노동자들을 돌아보게 한 것은 전태일 열사였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삶은 거저 얻어진 것은 없다. 어떤 사람들이 온몸을 던져 터준 길로, 많은 사람이 뒤따르며 걷고 걸어서 닦아진 길 위에 우리의 현재가 있는 것이다. 당연하게 강요되던 1일 12시간의 노동이, 10시간 노동으로, 8시간 노동으로 정착되고 그래서 더 많은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된 것은 역사의 성취이다.
정부는 주 56시간을 주장하고 유연화로 최대 69시간도 가능하다고 한다. 또 대통령은 120시간 빠짝 일하고 마음껏 쉬게 하라고 한다. 주 120시간이라면? 1일 17시간씩 7일을 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게 일하다가는 푹 쉬기도 전에 죽겠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길을 트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닦아온 길 위에서 이룬 역사의 성취가 50년 뒤로 후퇴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