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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담아 Jan 04. 2023

해방기원일지-어머니 편

한국현대사 속 우리들의 이야기(2)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마을회관에서 '항꾼에(함께:전라도사투리)' 놀다가 만 90년의 생을 마감했다.


글렀다


어머니는 무학이었다. 마을에 야학이 생기자 밤마실을 하는 딸들을 주저앉히며 외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단다. “바가지 밖으로 내돌리면 깨지는 벱이다. 글은 무신 글이여!” 그렇게 막 글눈을 떠 가던 배움의 즐거움은 구구단 3단인가 외우다 주저앉고 말았다.


그나마 푸릇푸릇하던 소녀의 운명은 "신랑이 영리하다드라." 한 마디에 절단나고 말았다. 외할아버지가 가라는 대로 신식공부한다는 가난한 잔반집 3대독자에게 시집을 왔는데 신랑은 그 공부 써보지도 못하고 촌구석에서 썩고 말았으니  ‘글렀다’고 할 밖에. 


손 하나 까닥 안 하는 시부모님에, 외지로 나간 남편에. 결국 머슴처럼 농사일을 홀로 감당하며 남편 없는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문여사의 천리마운동


어렸을 때다. 국가는 북한의 실태를 미끼로 나에게 반공사상을 주입하려 했다. 그런데 어쩌나 나는 그 미끼를 절대 물 수 없었다. 왜냐? 우리 어머니 생활은 북한의 실태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의 아침은 새벽별보기로 시작한다.

농사꾼으로 훈련이 안된 부실한 남편의 노동력을 채우려면 어쩌겠는가, 팔자가 웬수지. 새벽별 보기 다음은 천리마운동이 이어졌다. 7남매 두 살 터울 줄줄이 사탕들을 키우려면 농사일뿐 아니라 산으로 들로 천리마처럼 달려 돈 될 만한 것을 장에 내다 팔아야 했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야 했다. 하루가 24시간이라 천리를 뛰었지 더 길었다면 만 리도 뛰었을 것이다.


그리고도 틈틈이 삼시 세끼 시부모님의 끼니를 챙기러 해의 기울기를 보고 집으로 달려야 했다.


코를 박고 들어가 코를 박고 나와야 했다는 초가집을 천장 높은 환한 집으로 바꾼 것, 어머니의 성취였다 


한강의 기적과 시랜드로부터 해방


'각하'의 영도력은 진실로 위대하셨다. 전라도에서도 제일 깡촌 우리마을도 ‘새벽종이 울리’면 발딱 일어나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들'게 했다. 흙길이던 마을길이 시멘트로 포장되고 초가지붕은 슬레이트지붕으로 개량되어 갔다. 똥오줌을 퍼다 거름을 주던 시절이 가고 하얀 가루 비료를 흩뿌리기만 해도 농작물이 쑥쑥 자랐다. 벼 모가지 휘청휘청 휘는 생산력 뛰어난 통일벼를 심고 김 매고 해충 잡을 필요 없이 농약을 뿌리면 되는 '농촌근대화'가 '새마을'을 만들고 있었다. 


또 '각하'께서는 '조국근대화'를 위해 고심하시며 '요정'을 찾았고, 시바스 리갈을 마시며 얻어낸 번뜩이는 해법으로 국가발전을 이끄셨다. 하야 그 은총이 전라도 여천군 골짜기에까지 미치시어, 여천군 삼일면에 공업단지가 들어섰고 오지 '여천'이 사회 교과서에 실리는 영광을 주시었다(지금 여수국가산업단지). 그리고 온나라를 풀가동해 팔 수 있는 것은 죄다 팔아댔다. 심지어는 코리아나호텔의 기생관광까지. 드디어, 1977년 대한민국 수출액은 100억 달러를 달성했다. 1961년에 1인당 GDP 93달러가 1977년 1000달러가 됐으니 세계인들은  일컬어 '한강의 기적'이라 했다. 


허나 여수산단 근처는 암환자가 전국기준치보다 10% 높다는 어두운 역사는 알리지 않았다. (kbc,2021보도)


그 기적이 일어난 즈음 먼저 가신 시아버지에 이어 시어머니를 떠나보내며 어머니는 드디어 시집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농사꾼의 자식농사


농사라는 건 뒤통수를 맞기 일쑤였다. 한 해 한 번은 꼭 다 지어놓은 농사에 태풍이 뒤통수를 후려 갈기고 갔다. 시키는 대로 권장 작물을 심었다가 과잉공급으로 뒤통수를 ‘씨게’ 쌔리맞고 갈아엎기도 했다. 서울에서는 없어서 못 팔아 가격이 천정부지로 오른다는데 그 재미진 가격을 쳐서 받아본 농민은 없었다. 풍년은 풍년이라서 걱정, 흉년은 흉년이라서 망치는 것이 농사꾼 사정이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아 2022년 가을에도 농민들은 논을 갈아엎었다. 쌀값대책을 외치며.


‘100억달러’ 수출시대, 수출 경쟁력의 토대는 저임금. 생활물가를 잡아야 했다. 그러므로 농산물 가격은 무조건 꽉 밟아 눌러야 할 놈이었으니 한강에서는 기적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촌에서는 먼 나라 남의 나라일 같았다.


후려 맞기만 하는 농사꾼, 힘없는 농사꾼으로 키우지 않겠다고 결심한 어머니는 크기만 하면 자식을 순천으로, 서울로 올려 보내고 버스꽁무니도 안보고 밭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올려 보내고 나면 올려 보내야 할 돈도 늘었기 때문이다. 푸성귀 팔아 올려 보내고 논을 팔아서 올려 보내고, 소를 팔아서 올려 보내고.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가방 끈 길게 해주는 것 밖에 없는데, 왜 뭘 팔아야만 가능한지 나라는 뭘 하지는지 따져볼 틈도 없이 어머니는 또 밭으로 달려갔다.


그 결과 어머니는 ‘피는 것보다 꾸피는 게(펴는 것보다 굽히는 것)’ 편한 허리를 갖고 말았다.


늦둥이 막내가 15세가 되던 해, 어머니는 자식을 마지막으로 서울로 올려 보냈다. 싹수가 보이는 막내라고 서울서 교육시켜야 한다며 큰오빠가 데려 갔기 때문이다. 그해에 88올림픽이 열렸다. 어머니는 비로소 7남매로부터도 해방되었다.


그때가 60세였다.



문순례로서 30년 삶


비로소, 어머니만의 삶이 시작되었다. 딸, 며느리, 어머니가 아닌 자연인 문.순.례(가명)로. 돌이켜보면, 그간 어머니는 자신의 삶을 살아 본 적도, 자신의 욕망을 생각해 볼 기회도 없. 었. 던 것이다. 어머니의 고생이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는 국가 정책을 따르지 않은 탓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랴, 5남매가 이미 이 표어가 나오기도 전에 세상에 튀어나와 버린 것을. 둘만 낳아 잘 기르라고? 1950년대 만해도 자식 못 낳는다고 구박하고 첩을 들이던 시절이었다.


“엄마, 오늘은 뭐 했능가?”

“이, 꼬사리 꺾어다 여천장에 폴았다.”

“회관에서 놀지 왜? 힘 안 등가?”

“재미져. 폴아 갖고 시장 할마니들한테 막걸리 싹 돌맀다.”

마을회관은 사흘만 나가면 재미가 없단다.

애국가가 1절부터 4절까지가 빤하듯이 마을회관 화제도 빤하단다.


그러면서도 회관에 들러 한 턱 쏘고 오시기를 잘했다. 자리를 길게 지키지 않으면서도 존재감은 각인시키는 정치력 발휘, 입은 닫고 시의적절하게 지갑을 여는 군더더기 없는 처신, 잔말은 없으되 핵심을 가르는 몇 마디로 좌중을 정리하는 균형적 사고, 자식에게 하소연도 투덜거림도 일체 하지 않던 독립적인 삶의 자세,  문순례 여사의 강점이었다.


어머니 찬양인 것 같아 뒷담화를 덧붙이자면 ‘엄마하면 생각나는 음식?’ 7형제는 모두 없다고 말한다. 다정다감함, 잔정, 살뜰한 살림솜씨는 일절 없었다. 


어르신들의 구부러진 허리를 볼 때마다 굴곡진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겹쳐보인다. 


구부러진 허리에 대한 단상


80, 90대인 세대는 펴기보다 구부리는 게 편한 허리를 가진 분들이 많다. 여성은 어려서 가부장제에 눌렸고, 생면부지 시집의 노동력이 되어야 했다. 자식을 낳고 기르던 중년에는 고개 들고 허리 펼 틈이 없었다.

그녀들에게 귀는 열 되 입은 닫으라고 강요했으나 그녀들은 그것이 사회적 억압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의무만 있고 권리가 없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에게는. 군사정권이 조국근대화, 산업화를 앞세워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있는지, ‘잠깨는 약’을 먹여 가며 주 60시간도 넘게 일을 시키고 저임금에 재벌 좋은 일만 시키는지. 머리 들 새도 없이, 허리 펼 틈도 없이 일하느라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때때로 간첩사건이 터질 때면 총알이 빗발치고 옆 사람이 픽픽 쓰러져 가던 자신이 직접 겪은 전쟁의 공포가 엄습해, ‘때려잡자 공산당’으로 스스로를 더 강고하게 사상적 무장을 시켰을 것이다. 그것이 조작날조인지, 남북한 독재자들의 정권유지의 수단인지도 모른 채. 이제 살 만큼 살게 된 것이 진짜 누구 덕분인지 모른 채,

여전히 그 ‘위대하셨던 각하’를 찬양하며, ‘빨갱이’ 프레임에 홀딱 속아 넘어가는 시대를 이기지 못한 어르신들이 안타깝고 속상하지만,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나도 배울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면, 나도 어떤 모습일지 자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그 구부러진 허리이다. 내가 어머니보다 더 많이 배우고 더 잘 살게 된 것도

그 구부러진 허리 덕분임은 절대 사실이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의 삶을 보고 시댁의 노동력에 불과한 삶은 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86세대가 대개 나랑 비슷했는지 이 세대는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똑똑한 '쎈 언니'들도 많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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