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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mupet Nov 08. 2021

여행이 그리운 마음

그냥 생각나서 끄적끄적

여행을 가고 싶은 건 무엇을 보고 싶은 마음일까?

'해외여행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여행지'라는 제목의 sns를 보니 유럽의 어느 마을을 옮겨놓은 듯한 국내 명소 목록이 나온다. 여행에 대한 그리움은 그런 장소에 대한 선망일까?


많은 여행의 시작은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서 목격하는 건 그곳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여행자에게 진귀한 볼거리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이었다. 캐나다 로키산맥을 한 달간 여행하던 때 어떤 마을에서 그곳 주민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가 가본 곳이 어디인지  궁금해하길래 여기저기 캠핑을 하며 돌아다닌 국립공원들을 죽 나열했다.

"그곳들을 가보는 게 내 버킷리스트인데 벌써 다 가본 거예요? 원더풀!"

 캐나다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우리는 큰 마음먹고 여기까지 열 시간 넘게 비행기 타고 날아와서 여행을 하는 것이지만 당신은 캐나다에 살잖아요. 휴가만 내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 아니에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는 못했다. 이렇게 긴 말을 하기엔 나의 영어가 너무 버거웠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 도착한 나라에서 목격하는 평범한 일상 속에는 희한한 낯섦이 묻어있다. 다를 것이라는 기대 속에서 발견하는 별다르지 않은 일상, 평범한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경험하는 낯선 시선.

이방인이 되어 타인의 평범함 속을 거니는 건 묘한 해방감을 선사한다. 여행지에 사는 이들이 출퇴근하는 모습,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 골목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 이들의 평범한 일상이 여행자의 마음에 평온함을 가져다준다.  타인의 평범한 일상에서 이방인의 정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저 여행객이라 여길뿐 거기에 다른 수식어는 성가시기만 하다. 나의 세상, 벗어나고 싶은 일상에는 너무나 많은 수식어가 붙어있다. 누구네 집 누구, 무엇을 하는 사람, 어디에 사는 사람, 누구  친구, 누구 딸, 누구 아내, 누구 엄마 등등등. 아무것도 나를 속박하는 게 없는 듯한 자유로운 일상 속에서 얼기설기 얽힌 줄에 묶여 꼼지락 거린다. 제 집을 등에 짊어지고 사는 소라게 같다.


소라게라고 평생 껍데기를 등에 이고 사는 건 아니라고 한다. 몸집이 커져서 더 큰 집이 필요해지면 껍데기를 버리고 잠시 맨몸으로 지낸단다. 새집으로 쓸만한 커다란 껍데기를 찾을 때까지 소라게는 자유다. 무방비상태의 자유.


나의 세상, 나의 일상이 여행이 되지 못하는 건 쓸모없어진 껍데기를 버릴 용기가 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맨몸이 드러나면 바로 천적에게 잡아먹힐까 봐, 나의 취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날까 봐 겁이 나서 더 이상 필요 없는 껍데기를 등에 짊어지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어젯밤, 옷장을 정리하자고 마음먹고 이 옷 저 옷 뒤적이다 한벌도 제대로 버리지 못하는 꿈을 꿨다. 꿈에서 옷은 페르소나를 상징한다.


"이제 여기 있는 옷들을 더 이상 입지 않잖아. 버리는 게 어때?"


꿈의 제안을 받아들일 때 나의 일상은 여행이 될 수 있을까? 이제는 나에게 맞지 않는 껍데기, 그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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