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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smupet Nov 20. 2022

당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잘 모르는 사람이었네요.

누군가 나에게 보낸 문자였다.

당신을 잘 안고 생각했는데 잘 모르는 사람이었네요.

그 사람에게 답장을 보냈다.

저는 타인이 세상의 가장 큰 미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관계는 저에게 항상 배움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내가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었다'라고 말할 때 과거의 나는 방어태세에 돌입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어떤 실수를 저질렀나, 너무 내밀한 속마음까지 과도하게 노출한 것인가, 온갖 생각이 불안을 증폭시켰다.

그때 나는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알 수 없는 혹은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의 반응 앞에서 쉽게 절망하고, 화를 냈다. 그 사람의 '진심'을 알고 싶은 마음에 꽉 붙들린 채 속만 태웠다.

그때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원망했다.

속 시원하게 그 마음을 설명해주지 않는 타인을.

그래서 타인이 나를,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게 서운했다.

왜 나를 모를까? 이 정도 사이라면 알만도 할 텐데.


우리는 한 인간의 "세계"와 한 인간 공동체의 "세계"를, 번역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는 바로 그러한 것에서 피어나게 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인간의 공존은 오로지 전달될 수 없는 것의 공통성에 그 기초를 두는 것이지, 어디서나 이해 가능한 것의 소통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H. 롬바흐, <아폴론적 세계와 헤르메스적 세계>, 82쪽 인용


타인의 세계를 나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고 믿었다. 번역이 잘 안 될 때면 이상한 문장 구조를 가진 사람이라고 타인을 탓하거나, 나의 번역 실력이 형편없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타인은 번역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나의 언어로 번역한 타인은 그 사람에서 발견한 나의 어떤 모습일 뿐, 그건 그 사람이 아니었다.

 

해석의 맹점.

그 어느 곳보다 관계에 존재하는 가장 큰 도전이자 가장 매혹적인 부분.


관계 속에서 내가 경험하는 건 결국 나의 변화인 것 같다. 타인을 나의 언어로 번역하려고 할 때마다 나는 배움의 기회를 놓친다. 다른 혹은 낯선 세상, 타인이라는 신비를 경외하는 마음, 그걸 체험하는 기회가 사라진다.

관계 속에서 나는 나를 볼뿐이다. 그런 나를 보며 상대방도 자기 자신을 본다. 각자가 자신을 향하지만, 그러면서 우리는 서로의 재료가 되어주는 것 같다. 성장  혹은 성숙의 재료.


타인이 세상의 제일 큰 미지가 되고 나니, 사람이 좋아진다. 그리고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라며 미궁에 빠진 표정을 짓는 이에게서 나를 본다.

그 사람은 나에게서 자신의 어떤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그리고 지금은 또 어떤 모습을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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