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하면서 아들이 쓴 글에 곁들인 메모
남편 수술 후 달포 만에 병원을 옮겼다. 6개월 동안의 재활이 가장 중요한 시점이라 해서 재활 치료를 제일 잘한다는 서송병원으로 갔다. 낯선 병원 복도에는 사람 냄새도, 약 냄새도 없었다. 그즈음 남편, 대장 내시경 예약이 돼 있었다. 부평 병원에서 집 앞 수술했던 병원으로 이동해야 했다. 부득이 나는 그날 중요한 일이 있어 아들과 딸이 남편을 맡았다. 남편은 대장 내시경 하는 날, 퇴원하겠다고 날마다 노래를 불렀다. 인지 저하 상태라서 가당치 않은 일임을 이해시키고 설득해 봐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대장 내시경을 마치고 병원에 복귀하던 중 남편이 난동을 부렸다. 퇴원이 아닌 병원으로 복귀라는 것 때문에, 섬망 못지않은 남편의 상태에 아들과 딸은 사면초가에 처했다.
아랫글은 남편이 뇌 수술한 후 84일이 되었을 때 아들이 쓴 일기인데 내가 미처 붙잡지 못했던 것을 글로 포착해 놓은 글이다. 일생일대 가장 힘겨운 날이 아니었나 싶다. 아들과 딸에게, 더불어 인지 낮은 남편은 또 얼마나 힘겨웠을까. 아들이 쓴 글에 메모를 덧붙여 본다.
참 개 같은 나흘이었다. 병원에서 검사를 마치고 복귀할 때 집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아버지는 온갖 난동을 피워댔다. 좁은 차 안에 숨소리와 분노가 뒤섞였다. 창문에 부딪히는 손바닥 소리가 공기마저 흔들었다. 집이 멀어질수록 활화산처럼 타오른 아버지의 분노는 정점에 달하고 말았다. 나는 운전을 하면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소리를 질러댔다.
“제발, 그만 좀 해요.”
라고. 좀 엄청나게 크게 질렀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나왔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날 보곤 도끼눈을 뜨더니 소리를 지르면 네가 어쩔 거냐면서 몇 번이고 손찌검하려다 주먹을 내 얼굴 앞에서 멈춰 세웠다. 내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똑바로 아버지를 노려보니 약이 바짝 올랐던 아버지는 결국 나를 몇 대 때렸다.(남편은 이 즈음 인지가 시나브로 호전되기 시작하면서 집을 떠 올렸던 것 같다. 집에서는 멀쩡했는데, 어느 날 눈떠보니 병원이었고, 몸이 반쪽이 기울어져 있었으니 어지간하였을까 싶다.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지만 왠지 집으로 가면 몸이 온전해지지 않을까 싶은 환상을 가졌던 것 같다. 줄기차게 집에 가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집에 가서 무얼 할 수 있을 쏜 가. 설득이 먹힐 리 없었던 때라서 무조건 강행을 해야만 했다. 수술했던 병원에서 집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빤히 아는 길인데 그토록 가고자 했던 집을 외면한 채 재활병원으로 가는 걸 확인한 순간 남편의 분노가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던 것이다.)
힘이 다 빠진 아버지의 손은 아프지도 않았고 속이 상하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속이 상했다면 그 광경을 뒷좌석에서 모두 지켜보던 만삭의 누나가 정신을 못 차리고 울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빠가 억지로 차 문을 열고 내린다고 발광을 해댔다. 한 손뿐인 아빠를 이기는 건 어렵지 않았는데, 갑자기 평소엔 움직이지도 못하던 아빠의 왼손이 차 문 사이로 밀고 들어와 그대로 찍혀버렸다. 엄청 아팠을 테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신음도 없었다. 감각이 다 죽은 것이다. 절망과 희망이 이상스럽게 교차했다. 그제야 나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런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이지 않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는데. 내가 소리를 지른다고 차려지는 정신이 아니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는데. 기어코 누나 앞에서까지 미친 짓을 하는 아버지를 보곤 참을 수 없었다. 참았다면 괜찮았을까.
(아, 정말 인지가 제대로 돌아오지 않은 환자를 간병하는 일은 죽을 만큼 힘겹다. 도대체 상황 파악을 못하다 보니 소귀에 경 읽기 격이다. 본인의 의사가 외면당했다 싶을 때는 무조건 분노 폭발이니 감당해 낼 재간이 없다. 나보다는 딸이 아빠를 설득하기가 수월할 것 같아서 딸을 보낸 것이었다. 아들이 자기가 아빠한테 소리 지르지 않고 참았다면 괜찮았을까라고 반문하는데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이 지경에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분노하는 일뿐이다. 아들이 누나에게 처참한 모습 보여서 얼마나 미안했을까 싶어 가슴이 아리다.)
사흘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었고, 그땐 그냥 차 안에서만 집에 가겠다고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고 끝났었다. 내가 뭘 할 새도 없이 병원에 도착하니 운명을 받아들이고 순순히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젠 왜 그랬을까.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이제 내가 아버지를 포기하면 온 세상이 포기하는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의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살아있는 인류의 대표로서 아버지 앞에 있다. 내가 소리를 지르면 온 세상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당연지사 고함에 아버지의 발광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하는 수 없이 누나를 먼저 보냈다. 마음을 추스를 시간도 없이 울며 운전해야 하는 누나도 신경이 쓰였지만, 아버지의 눈에 우리 차와 누나가 보이면 말도 안 되는 집에 가겠다는 희망을 계속 품을까 봐 인사도 없이 멀어지게 해야 했다. 밤이 되자 누나는 카톡으로 내게
당장 병원을 나오라고 말했다. 이런 사람 옆에서 무슨 개고생이냐고.
("당장 병원을 나오라고 말했다. 이런 사람 옆에서 무슨 개고생이냐고." 비통한 상황을 다 지켜본 누나가 할 수 있는 말이다. 동생이 아버지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본 누나가 무어라 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니까 다 감당하고 참아내면서 버텨내야지 어쩌겠느냐고 다독일 수는 없다. 아빠의 정신이 멀쩡하면 모를까. 그 와중에 아들은 누나를 더 이상 힘겹게 하고 싶지 않아 상황이 종료되지 않았음에도 먼저 보냈다. 행여 아빠가 누나한테 집에 가게 해달라고 조를까 봐 겁이 나기도 하였을 것이다.)
어제 그 생난리를 떠는 바람에 엄마와 누나가 내 걱정을 엄청나게 한다. 누구보다 아빠를 사랑했던 누나가 내게 병원을 나오고 간병인을 쓰라 말하고, 엄마는 조금이라도 희망을 발견하길 바라면서도 겸허히 내 선고를 기다린다. 나는 이제 희망을 찾는 사람이 아닌, 희망이 없다는 공증을 내리는 사람이 되었다. 행복 바이러스도 한 때였다. 내가 처음 이 병원에 들어와 아버지의 시간을 본 궤도에 올려둔 후, 다시 후퇴하고 있다. 잠깐의 항우울제가 만들어 낸 착각.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단 한 발자국이라도 진전이 있었는지 의문스럽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처음의 수술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우린 죽은 사람을 살려낸 값을 치르고 있다. (사람을 살려낸 값을 치르는 것, 가혹하기 짝이 없다. 남편이 쓰러졌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 후 치러내야 할 몫이 어마어마했다. 완치가 없는 이 병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서, 몸으로 마음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감당해 내기 버거운 현실도 인정해야 된다. 사람의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말도 인정하지만.)
엄마는 늦은 밤 아빠의 핸드폰으로 몇 년 전 누나의 결혼식 날 멋지게 치장한 엄마와 아빠가 웃으며 찍힌 사진을 전송해 왔다. 한 장의 사진과 그걸 보낸 시각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짙은 감정의 호소였다. 그때가 그립지 않으냐고, 돌아가고 싶지 않냐고. 아빠는 그 사진을 1초도 보지 않고 껐다. 엄마의 마음이 전해질 장소도 사라진 것이다. 그런 엄마가 너무 불쌍해서 그랬을까, 늦은 새벽까지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빠를 버려도 누나와 나는 어찌어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어떡하지. 그런 엄마를 보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걱정이다. 엄마의 감정 속에, 눈물 속에 예전의 아빠가 너무 생생하게 살아있다. 이대로 아빠를 놓으면 엄마도 같이 놓아버리는 꼴이 될까 봐 두렵다.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음에도 아빠의 얼굴은 예전과 많이 닮아있어 결단을 어렵게 만든다. (해맑은 미소를 짓고 정답게 찍은 사진을 남편한테 전송했다.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낸 것이었는데 아들이 용케 알아봐 주었고, 남편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걸 몰랐다. 남편의 의지를 불사를 수 있는 자극제가 되겠다 싶은 것들을 시도했었는데. 어처구니없다. 남편이 지극히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희망의 끈을 절대로 놓을 수 없었던 발로였다. 나도 남편을 놓아 버리고 싶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 죽었다 싶었을 때 살려만 달라고 간청을 했던 나였다. 사람 마음은 간사하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지금에 이르렀다. 아들이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코끝이 찡해오도록 갸륵하다.)
조금 전 엄마는 왜 우리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딜 봐도 우리보다 모두 행복해 보인다고. 나는 웃으며 말했다. 여기선 안 그렇다고. 여긴 우리보다 불행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고. 이런 말들로 위로가 되지 않는 걸 너무 잘 알지만, 이렇게라도 웃어야지. 이렇게 하루하루 버텨봐야지.
(내가 불행하다고 하면 아들은 언제든지 동조했다. 그런데 이날은 다르게 말했다. 가족은 서로 끌어당겼다가 느슨하게 풀어 주기도 하면서 이어나가는 관계인 것 같다. 아들과 간병을 같이 해 냈기에 내가 버틸 수 있었다. 초창기 3개월은 정신을 제대로 차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살아 냈는지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체중이 10프로나 줄어들었고, 잠을 제대로 자 본 적도 없었다. 밥을 맛있게 먹어 본 적도 없었고, 텔레비전이나 책, 기타 등등 무엇에든 한시도 집중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시간들을 버티게 해 준 이가 아들이었고 딸이었다. 더 나아가서 종국에는 남편이 시간이 지나면서 시나브로 호전이 되었기에 지금이 있는 것이다.)
남편이 중환자실에서 나온 첫날과 그다음 이 시점이 가장 힘든 시기였다. 남편의 인지 상태가 저하되었다가 조금씩 호전되던 때라, 오로지 집에 가는 것만이 그의 목표였다. 자기 몸 상태가 어떤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시간이 지나면 걸을 수 있을 거라 믿었고, 마비된 팔은 애초에 문제로 여기 지도 못했다. 남편은 그렇게, 용감무쌍하게 “집으로, 집으로”만 외쳐 대던 때였다.
어젯밤, 아들과 담소를 나누다 이 일기를 건네받았다. 너무 아파서 차마 엄마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며, 그 시절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히던 아들. 그로부터 천 일이 지났다. 남편은 여전히 완전하진 않지만, 그 깊은 절망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 창문을 스치는 바람 냄새가 집안 공기와 섞였다. 그 바람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덜 절망적으로 숨을 쉬었다. 시간이 만들어 준 변화였다. 그 시기를 견딘 우리 가족, 이제는 조금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아들의 고통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이 일기를 읽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 긴 시간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마음을 얹어 아들에게 말할 수 있다.
아들아, 천일 동안 우리는 버티는 법을 배웠고, 말보다 깊은 마음의
기록을 남겼구나. 네가 애쓴 모든 시간들이 기적을 낳은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