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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간병이라는 형벌과 여전히 유효한 세계

동병상련(신달자 선생님) 책으로 마무리

by 능수버들


들어가면서


예고도 없이 급작스럽게 쓰러진 남편 앞에서, 나는 인간의 나약함과 삶의 부조리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그날 이후, 나의 세계는 ‘이전’과 ‘이후’로 나뉘었다. 시간은 엉켜버렸고, 일상은 산산이 흩어졌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섰다. 간병의 시간은 내게 사랑의 시험이 아니라, 존재의 근육을 단련하는 고통의 연습이었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사실 내 안의 절망을 견디는 일이었다. 그 절망 속에서 나는 살아 있으나 죽음 곁을 맴도는 나날을 보냈고, 글로 버텼다. 기록은 나의 기도였고, 글쓰기는 나를 다시 숨 쉬게 한 산소였다.


『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를 읽었을 때, 나는 마치 내 얘기를 대신 써준 듯한 느낌이었다. 페이지마다 스며들던 문장들이 내 마음속을 헤집으며 오래 묵은 눈물을 끌어올렸다. 나는 저자와 함께 울었고, 함께 절망했고, 함께 다시 일어섰다.


이 책은 『백치 애인』, 『물 위를 걷는 여자』로 1990년대를 뜨겁게 달궜던 작가가 쓴 체험 수기다. 남편을 간병하면서 쓴 글이지만 단순한 간병 내용이 아니다.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24년간 돌보며 겪은 삶의 심연과 고독, 그리고 그 속에서 길어 올린 단단한 의지의 기록이다. 고통의 시간을 오롯이 견디며 선생님은 꺾이지 않고, 오히려 새롭게 태어났다. 그 이야기를 따라가며 나 역시 내 안의 어둠을 마주했고, 조금씩 다시 숨 쉬는 법을 배웠다. 무너진 일상을 주워 다시 이어 붙이듯, 삶을 다시 꿰매며 여기까지 왔다. 그 시간의 결을 따라, 나는 이 마지막 장에 간병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남기려 한다. 신달자 선생님의 조력을 한껏 받으면서.


동병상련으로 만난 신달자 선생님


시지프스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신을 기만하지도 않은 저자와 나에게 왜 시지프스의 형벌 못지않은 간병의 무게가 주어진 것일까. 인간의 운명은 때로 죄와 상관없이 고통을 부여하고, 그 무게는 불합리하게도 고르게 분배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삶이 품은 근본적인 부조리다. 인간은 고통의 이유를 묻지만, 세계는 침묵한다. 그 부조리를 껴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저자와 내 몫이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다음 날 혼수 속으로 떨어져 23일 만에 깨어난 사람이다.
23일을 그는 죽어 있었고 그래서 가족들도 23일간 그의 죽음을 연습해야 했다.”(p.29)


죽음을 예행연습해야 했던 가족들의 시간, 나 역시 남편의 병과 함께 날마다 죽음을 연습하며 살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자와 동병상련의 애환을 마주하며 나는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같은 처지에서 그녀가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는지에 집중하며 한 문장 한 문장 읽어 내려갔다. 긴장과 떨림 속에서 어떤 부분은 천천히 곱씹고, 어떤 부분은 빠르게 진도를 나갔지만, 어느 대목에서는 오래 머물 수밖에 없었다. “병이란 매우 잔인한 폭군이었다”라는 문장을 만났을 때 나는 감정이 격해졌다. 병은 육체만이 아니라 정신과 인간관계, 삶 전체를 뒤틀어 놓는다. 저자가 “온몸으로 울었고 온몸에서 눈물이 흘렀다”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단순한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쏟아낸 통곡이었다. 나 역시 남편의 병이 내게도 무거운 형벌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간병은 단순한 ‘돌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혼란이었고, 내 어깨를 짓누르는 끝없는 짐이었다.



간병이라는 형벌


힘겨운 간병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이나 희생이 아니라 자존심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절체절명의 순간을 붙드는 힘은 ‘여기서 절대 무너지지 않겠다’라는 그녀의 내적 고집이었다. 남편의 본래 모습을 찾아주고 일상생활을 해낼 수 있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자존심이 저자와 나를 이어주는 접점이었다. 남편을 곧추세우기 위해 신달자 선생님은 집을 팔아 병원비와 치료비를 감당했고, 무당과 점쟁이의 말에도 매달렸다. 수많은 방법을 동원해서 활화산처럼 집념을 불태웠지만 남편의 몸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몸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신까지 피폐해져 가는 남편 앞에서 저자는 오열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감히 고백한다.


그가 눈을 뜨고 정확하게 3년이 지나면서 나는 그가 살아났다는 것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때 진작 죽었어야 했는데 저걸 살려 냈다니 …”(p.29)

이 문장을 읽으면서 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간병이 불러오는 황한 심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 대목이었지만, 동시에 내 폐부를 깊게 찔렀다. 난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쏜 가.


저자의 남편도 우리 남편처럼 왼쪽 편마비로 불편하게 살아간다. 그는 호전되지 않는 몸을 저주하며 우울증이 깊어져 삶을 포기하려 시도하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저자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예의 주시하던 중, 나는 몹시도 부러운 장면을 만났다. 저자의 남편이 불완전하게나마 교수직에 복귀하는 대목이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삶의 무대 위에 선 것이다. 그는 교수로 복직하며 가장으로서의 자존심과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다소나마 회복했고, 저자가 그토록 소망했던 당당한 삶이 현실이 되었다. 축복하고 축복해야 할 일이거늘, 나는 왜 그 장면에서 부러움과 질투심이 속절없이 솟구쳤던 것일까.


우리 남편은 어느 지점에서 회복이 멈춰 버렸다. 회사 복귀는커녕 집 안에서조차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저자의 남편과 내 남편의 차이는 나를 더 깊은 좌절 속으로 끌어내렸다. 질병은 공평하지 않다는 불만이 치밀어 오르려는 순간, 극명한 차이를 알아차렸다. 저자의 남편은 젊디 젊은 30대였으니 당연히 우리 남편보다 호전 속도가 30배는 빨랐으리라. 너무나 당연한 사실 앞에 나는 기어이 숙연해지고 말았다.


여전히 유효한 세계


저자의 남편은 끝끝내 온전한 상태로 돌아오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24년을 살다가 세상을 등진다. 먼저 남편을 떠나보낸 저자는 상실과 그리움에 직면한다. 환자가 사라진 뒤 그녀의 삶은 고요했지만, 그 고요 속에서 “싸우더라도 함께 할 배우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인간적인 위로였는지 새삼 깨닫는다. 그즈음 저자는 암 수술을 받기 위해 수술실로 들어서며 상념에 잠긴다. 그가 옆에 있었다면 극적인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며 불현듯 남편을 떠올린다. 서른세 번의 항암 치료 속에서 그녀는 백 번은 죽다 살아났다고 회상하, 몸이 아픈 사람의 외로움이 얼마나 깊은지 체험한다. 그제야 남편이 병마와 싸울 때 느꼈던 끔찍한 외로움을, 겨자씨만큼이나 마 이해했다고 고백한다.


남편은 중요한 존재이며, 죽음까지 함께 가는 파트너이다. 천국은 있어야 할 사람 이 다 있는 곳이다. 있어야 할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
그것이 천국이며 축복임을 나는 알았다.”(p.223)


지금 우리 남편은 더 이상 사회적 성취로 증명될 수 없는 삶을 살아내고 있다. 병이 발병한 후 남편이 느꼈을 외로움과 절망에 대해 나는 과연 얼마나 공감했을까. 아니 지금도 남편의 심정을 내가 알기나 하는 걸까. 병자와 간병하는 자는 서로의 애로사항을 끝내 다 알지 못한 채 함께 짊어지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곁에 가족 있고, 그 자리에 남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계는 여전히 유효하다. 가족이 함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세계를 지탱하는 기둥이다. 같은 공간에서 남편과 함께 책을 읽고 음식을 나누며 헬스장을 오가는 일상들. 결국 있어야 할 사람과 그 자리에서 함께 하는 것이 삶이다.

간병의 시간은 저자와 나를 짓누르는 멍에였지만, 그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존재인지를 목격했다. 삶은 때때로 무겁고 불합리하지만, 그 무게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은 단연코 사소하지 않다. 바위를 밀듯 견뎌낸 시간은 신달자 선생님을 단단하게 만들었고, 기어이 그녀가 원하는 삶을 창조해 냈다. 나 역시 그동안의 내 삶은 단지 소모와 절망의 무게로만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어쩌면 나는 불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상에 절체절명으로 불행한 일은 없다. 사람들은 아직 벗어날 방도가 있는데도 너무 일찍 절망하는지 모른다. 인간은 희망에 속는 일보다 절망에 속는 일이 더 많다.”

“인간은 인내의 터를 넓히는 사람이 결국은 이기는 법이다. 참지 못하면 궁궐도 무너지게 하는 법이지.” <p.257>


나가면서


책을 덮고 나는 한참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눈앞에 남은 것은 남편의 병마의 그림자와 바위 같은 현실뿐이었지만, 그럼에도 희미한 빛 하나를 보았다. 끝없이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 바위를 밀어 올리는 순간만큼은 그도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나 또한 끝없이 내려오는 절망을 밀어 올리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단단해졌고 더 단단해지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불행하지 않다. 한국인의 정서인 ‘정’이 내 안에 가득 차 있다. 절망에 속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인내의 터를 넓히기 위해 오늘도 나는 그 '정'을 한껏 밀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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