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6. 무너지지 않기 위해 살고 있습니다

딸에게 쓰는 편지/후회는 깊이를 만든다

by 능수버들


언제나 다정다감한 딸아!
이 편지는 엄마 안에서 멈추지 않는 기억을 붙잡은 기록이자, 네 마음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아빠가 쓰러진 후, 엄마는 오래도록 후회를 되뇌었단다. 그렇게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왜 엄마는 아빠 몸이 던진 신호를 놓쳤을까.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빠가 쓰러지기 전 찬란했던 날로 돌아가고 싶었어. 소리 없이 일상이 무너져 내리기 직전의, 그 평범한 일상으로.


인주가 죽은 뒤 나는 오래 후회했다.
『바람이 분다, 가라』 p.28

『바람이 분다, 가라』책을 읽다가 이 구절이 엄마 마음 안에서 쉼 없이 맴돌았단다. 정희처럼, 엄마도 그렇게 후회에 갇혀버릴 것 같았거든. 후회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더라. 오히려 더 날카롭게, 심장을 깊이 파고들었단다. 아빠가 쓰러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그 ‘후회’ 속에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그래서였을까. 끊어 낼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엄마는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더라.


아빠는 가끔씩 자다가도 비명을 질렀어. 왼쪽 다리에 쥐가 났다며 고통을 호소했지. 엄마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아빠 다리를 주물러주곤 했어. 그때마다 간청을 했단다.


몸이 고장을 알리는 신호일지도 몰라요.
병원에 가 봅시다.

아빠는 언제나 괜찮다고 했어. 몸이 부서질 때까지, 병원이라는 말조차 꺼내려하지 않았지. 몸의 신호를 애써 무시하고, 아빠는 오로지 가장의 길만 걸었어. 바쁘다는 이유로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잰걸음으로 신호등을 건너는 사람처럼. 그 빠른 걸음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나서야 알아차리게 되는 몸 상태. 건강 체크 잘하라는 메시지에 아빠가 응하지 않으니, 결국 아빠 몸이 강제로 멈춰 버린 낭패.


잊을 수 없는 애절한 장면이 하나 있어. 6년 전, 아빠가 강원도 공사 현장으로 물건을 싣고 갔단다.
운송장을 들고 뙤약볕 속을 걸어서 사무실로 향하다가 아빠가 '픽' 쓰러졌어. 쓰러진 아빠 왼쪽 눈가가 찢어졌고. “눈가에서 흐르던 붉은 피가 흙으로 스며들었고, 그 차가운 감촉이 아빠의 의식을 깨웠다는구나.”

그때 공장 직원이 아빠를 발견해서 다급하게 응급실로 옮겼어. 한여름이라서였는지 의사가 '일사병'이라 했다지만, 엄마는 믿기 힘들었어. "왜 그 의사는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았을까?"라는 의심을 했어. 아빠에게 엄마가 말했었지.


갑자기 쓰러진 것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온 것이니 놓치면
안 됩니다. 병원 가 봅시다. 한 번만이라도.

지진이 나기 전 전조 증상이 있듯이, 그날 아빠 몸이 신호를 보낸 거였어. 아빠 몸이 고장 나고 있다는 완벽한 신호를, 그 중요한 알림을 놓치고 만 게지.


아빠의 “괜찮아”라는 말을 왜 믿었을까. 엄마는 왜, 더 단호하게 아빠를 병원에 데려가지 못했을까.

‘아빠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핑계로,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한 엄마가 내내, 원망스러웠단다.


숨 쉬는 일조차 힘겨웠던 날들, 엄마는 가슴 깊이 ‘한’을 품게 되더라. 마치 산행을 하다 발을 헛디뎌 아빠가 미끄러지는 걸 보면서도,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던 엄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몇 번이고 깊은 한숨을 토해내곤 했던 엄마.


병원 생활은 고된 날들의 연속이었단다. 아빠를 돌보는 동안, 엄마는 하루를 몇 조각으로 나눠 살았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정신없었지만, 마음은 늘 아빠가 쓰러지기 이전에 멈춰 있었어. 밥숟가락을 들다 말고 울컥 눈물이 차오르고, 복도 창가에 기대어 숨죽여 울기도 했어. 그 참혹한 일을 겪기 전에는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었단다. 그러나 삶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답을 주더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빠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엄마의 회한 또한 쉬이 떨쳐 낼 수가 없었어. 그래도 엄마는 날마다 버텼고, 그렇게 버틴 날들이 조금씩 엄마를 바꾸어 놓았단다. 후회는 엄마를 과거에 붙잡아두었지만, 그 안에는 아빠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함께 있었던 거지. 아빠가 병원을 멀리했던 건, 설마 당신 몸이 소리소문도 없이 무너져 버릴 것을 상상도 못 했던 거잖아. 생고생을 사서 하고 싶었던 건 결단코 아니었을 테니까. 이제는 그 마음까지도 헤아리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아빠 몸 상태도 시나브로 호전이 되더구나. 편마비가 된 아빠를 다시 온전히 일으킬 수는 없지만 이제는 고된 시간을 지나온 엄마를 안아볼 수 있게 되었어. 후회는 잃어버린 시간만큼 사유로 깊이를, 채워준 덕분이지.

8.0의 강진은 지나갔다. 여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거야. 때로는 모든 게 무너질 것 같고, 다시 일어날 힘조차 없을지도 모르지. 그 속에서 엄마는 단단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무너지기도 하면서 살아 낼 거란다. 언젠가 너도 견디기 힘든 하루를 마주할지도 모른다. 그때, 이 편지가 너에게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분명 괜찮아질 거야. 지금 이 순간도 진심을 다해 살아내고 있으니.”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