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쓰는 편지/후회는 깊이를 만든다
언제나 다정다감한 딸아!
이 편지는 엄마 안에서 멈추지 않는 기억을 붙잡은 기록이자, 네 마음에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아빠가 쓰러진 후, 엄마는 오래도록 후회를 되뇌었단다. 그렇게 가까이 있었으면서도 왜 엄마는 아빠 몸이 던진 신호를 놓쳤을까. 되돌릴 수만 있다면, 아빠가 쓰러지기 전 찬란했던 날로 돌아가고 싶었어. 소리 없이 일상이 무너져 내리기 직전의, 그 평범한 일상으로.
인주가 죽은 뒤 나는 오래 후회했다.
『바람이 분다, 가라』 p.28
『바람이 분다, 가라』책을 읽다가 이 구절이 엄마 마음 안에서 쉼 없이 맴돌았단다. 정희처럼, 엄마도 그렇게 후회에 갇혀버릴 것 같았거든. 후회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더라. 오히려 더 날카롭게, 심장을 깊이 파고들었단다. 아빠가 쓰러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그 ‘후회’ 속에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그래서였을까. 끊어 낼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엄마는 자꾸만 들여다보게 되더라.
아빠는 가끔씩 자다가도 비명을 질렀어. 왼쪽 다리에 쥐가 났다며 고통을 호소했지. 엄마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아빠 다리를 주물러주곤 했어. 그때마다 간청을 했단다.
몸이 고장을 알리는 신호일지도 몰라요.
병원에 가 봅시다.
아빠는 언제나 괜찮다고 했어. 몸이 부서질 때까지, 병원이라는 말조차 꺼내려하지 않았지. 몸의 신호를 애써 무시하고, 아빠는 오로지 가장의 길만 걸었어. 바쁘다는 이유로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잰걸음으로 신호등을 건너는 사람처럼. 그 빠른 걸음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나서야 알아차리게 되는 몸 상태. 건강 체크 잘하라는 메시지에 아빠가 응하지 않으니, 결국 아빠 몸이 강제로 멈춰 버린 낭패.
잊을 수 없는 애절한 장면이 하나 더 있어. 6년 전, 아빠가 강원도 공사 현장으로 물건을 싣고 갔단다.
운송장을 들고 뙤약볕 속을 걸어서 사무실로 향하다가 아빠가 '픽' 쓰러졌어. 쓰러진 아빠 왼쪽 눈가가 찢어졌고. “눈가에서 흐르던 붉은 피가 흙으로 스며들었고, 그 차가운 감촉이 아빠의 의식을 깨웠다는구나.”
그때 공장 직원이 아빠를 발견해서 다급하게 응급실로 옮겼어. 한여름이라서였는지 의사가 '일사병'이라 했다지만, 엄마는 믿기 힘들었어. "왜 그 의사는 다른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았을까?"라는 의심을 했어. 아빠에게 엄마가 말했었지.
갑자기 쓰러진 것은 몸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를 보내온 것이니 놓치면
안 됩니다. 병원 가 봅시다. 한 번만이라도.
지진이 나기 전 전조 증상이 있듯이, 그날 아빠 몸이 신호를 보낸 거였어. 아빠 몸이 고장 나고 있다는 완벽한 신호를, 그 중요한 알림을 놓치고 만 게지.
아빠의 “괜찮아”라는 말을 왜 믿었을까. 엄마는 왜, 더 단호하게 아빠를 병원에 데려가지 못했을까.
‘아빠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핑계로,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한 엄마가 내내, 원망스러웠단다.
숨 쉬는 일조차 힘겨웠던 날들, 엄마는 가슴 깊이 ‘한’을 품게 되더라. 마치 산행을 하다 발을 헛디뎌 아빠가 미끄러지는 걸 보면서도, 손을 잡아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들었던 엄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몇 번이고 깊은 한숨을 토해내곤 했던 엄마.
병원 생활은 고된 날들의 연속이었단다. 아빠를 돌보는 동안, 엄마는 하루를 몇 조각으로 나눠 살았어.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정신없었지만, 마음은 늘 아빠가 쓰러지기 이전에 멈춰 있었어. 밥숟가락을 들다 말고 울컥 눈물이 차오르고, 복도 창가에 기대어 숨죽여 울기도 했어. 그 참혹한 일을 겪기 전에는 모든 걸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었단다. 그러나 삶은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답을 주더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빠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엄마의 회한 또한 쉬이 떨쳐 낼 수가 없었어. 그래도 엄마는 날마다 버텼고, 그렇게 버틴 날들이 조금씩 엄마를 바꾸어 놓았단다. 후회는 엄마를 과거에 붙잡아두었지만, 그 안에는 아빠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도 함께 있었던 거지. 아빠가 병원을 멀리했던 건, 설마 당신 몸이 소리소문도 없이 무너져 버릴 것을 상상도 못 했던 거잖아. 생고생을 사서 하고 싶었던 건 결단코 아니었을 테니까. 이제는 그 마음까지도 헤아리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아빠 몸 상태도 시나브로 호전이 되더구나. 편마비가 된 아빠를 다시 온전히 일으킬 수는 없지만 이제는 고된 시간을 지나온 엄마를 안아볼 수 있게 되었어. 후회는 잃어버린 시간만큼 사유로 깊이를, 채워준 덕분이지.
8.0의 강진은 지나갔다. 여진은 지금도 계속되고, 앞으로도 멈추지 않을 거야. 때로는 모든 게 무너질 것 같고, 다시 일어날 힘조차 없을지도 모르지. 그 속에서 엄마는 단단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무너지기도 하면서 살아 낼 거란다. 언젠가 너도 견디기 힘든 하루를 마주할지도 모른다. 그때, 이 편지가 너에게 작은 등불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분명 괜찮아질 거야. 지금 이 순간도 진심을 다해 살아내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