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읽었던 책들 보고 아무 생각이나 하기
“주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해하게 해 주시고,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체념할 줄 아는 용기를 주시며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이라는 기도문으로 유명한 사람이다. 그 기도문 안에는 위와 같은 구절이 들어있다.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내 욕심과 기대로 사람 관계에 괜스레 실망하고 서운해하지 않기 위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기대와 서운함은 주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쏠려 나타날 위험이 있다.
그 사람이 이게 필요하겠지, 이걸 주면 좋아하겠지- 라는 생각으로 잘해주거나 또는 그 사람이 이런 일이 있을 때 난 이렇게 해줄 거야. 라고 나 혼자만의 판단으로 어떤 행동을 한다. 그리고 반대 상황에서 상대방이 나를 그만큼 신경 써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 큰 서운함을 느낀다. 요 며칠 너무 혼자 있기도 했고 정기적인 우울함이 찾아오는 시점과 딱 일치하여, 특정 사람 - 아주 가까운 사람 - 에게 나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서운함을 느꼈다.
내가 대학생 때 완전 좋아한 책 중 ‘얀 이야기’라는 게 있는데 언덕에 사는 고양이 얀에게는 강에 사는 물고기 카와카마스가 찾아와 물건 하나씩을 빌려간다. 어제는 우산을 빌려가면 오늘은 소금통을 빌려가고 내일은 물병을 빌려가는 식. 얀은 그때마다 카와카마스에게 기꺼이 자기가 가진 물건을 준다. 항상 따뜻하게 그를 맞이하고 그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스스럼없이 줄뿐더러 돌려달라거나 역으로 뭘 달라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짧은 소설에는 이 스토리가 끝이다.
책의 맨 마지막엔 아래와 같은 작가의 글이 쓰여있다.
만약 그대가 카와카마스는 늘 꾸기나 하고, 게다가 꾸어 간 것들을 갚을 줄 몰라 교활하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그대가 조금 지쳐 있다는 증거다. 오늘 하루는 우선 학교를 쉬어라. 학원도, 예비학교도 쉬어라. 회사도 쉬어라. 온 하루를 아무런 생각 없이 멍하니 있어 보는 것이다.
만약 그대가 혹여 카와카마스는 [이름의 날]을 구실로 삼은 사기꾼이라 여긴다면, 장 주네(프랑스의 소설가)처럼 가방 속에 칫솔 하나만 달랑 넣고서 지금 곧 회사에 사직서를 내던지고, 학교는 무단으로, 학원이나 예비학교는 지체 없이 그만두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 보라. 아득히 먼 이국의, 여행지의 싸구려 호텔을 전전하면서 그냥 그대로 인생 최후의 날에 칫솔 하나 남기고 떠난다 해도 그것은 그것대로 그대의 책임이다.
도저히 그런 일은 못하겠다, 나날의 일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가 있다면, 카와카마스가 영원히 -어쩌면- 먹어 본 적이 없는 버섯 수프를 만들며 스스로를 달래기 바란다.
처음 이 글을 읽었을 땐 뭐에 콩 하고 머리를 맞은 듯이 얼얼했다. 당연히 카와카마스는 남의 물건을 빌려가기만 하는 못된 놈이고 얀은 바보 같이 당하기만 하는 불쌍한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무언가를 주면 꼭 상대방도 나에게 그에 응당한 무언가를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그게 물건이든 마음이든 표현이든).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은, 내가 얼마나 여유 없이 살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며칠 전, 연애에 고민이 많은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여자친구와 싸운 고민이란다. 왜냐고 물어보니, 자기가 오늘 친한 친구 청첩장 모임이 있었는데 그 모임이 하필 (예비 신부를 포함해) 자기 빼고 다 여자인 모임이었다. 이걸 말하면 여자친구가 왠지 싫어할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 상황을 귀찮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친구는, 하필 청첩 모임 당일 아침에 여자친구에게 이 약속을 얘기한 거다. 여자친구는 남자친구가 당일 오전에 그 얘길 한 게 서운해서 토라졌다(누가 더 잘했고 누가 더 잘못했다는 판단은 아예 제외한다). 여차저차 둘은 싸우게 됐는데 그날 밤 친구(남자 쪽이 내 친구다)가 내게 전화와서 자기 여자친구에게 너무 서운하다고 했다.
“나는 며칠 전에 그 친구 집에 바퀴벌레가 나왔다고 해서 직접 찾아가고 방역업체도 불러주고 정말 잘해주려고 노력했는데 왜 이번 일에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렇게 화만 내는지 모르겠어. 미안하다고도 했단 말이야. 어쨌든 난 그 친구에게 정말 잘해주고 있었는데 이번 일이 그렇게까지 싸울 일인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워.”
요즘 내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 같았다. 분명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를 걱정해서 늦은 밤에 그 집을 찾아가고 방역업체까지 불러서 집을 깨끗이 치워준 건 너무 고마운 일이다. 사랑꾼이라고 불림받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 일을 내가 해줬다고 해서, 오늘의 여자친구가 다른 일로 덜 서운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걸까? 엄밀히 말하면 여자친구 집에서 바퀴벌레가 나왔다는 소릴 듣고 (그 여자친구가 정확히 그걸 요구하지 않았다면) 직접 찾아가고 방역업체를 불러준 건 본인이 원해서 한 일인데. 내가 원해서 한 일로 상대방에게 반대급부를 원하는 순간 갈등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요즘처럼 젠더 이슈가 예민한 시점에, 남/녀를 나눠 갈등 문제를 비추고 싶지 않기 때문에 역으로 내 얘기를 써보자면, 난 책 읽고 내가 마음에 들었던 책을 남에게 추천하길 좋아한다. 그래서 대학교 연애할 때 long long time ago 구 남친에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에 밑줄/메모/편지를 써서 선물한 적이 있다. 내 딴에는 200페이지가량의 책에 정성스레 하이라이팅 하고 그 문장과 관련된 편지를 써서 주는 일에 엄청난 시간과 공을 들였다 다. 그런데 책을 받은 그 사람은 별 반응도 없고 몇 주, 한 달이 지나도록 책을 읽었단 말조차 없더라.
속상해서 친한 오빠들에게 고민 상담을 했었는데 그 오빠들이 내게 일침을 가했다.
“네가 주고 싶어서 준 책 아니야? 근데 그걸 읽으라고, 감동받으라고 강요할 필요가 있나?”
어떤 오빠는... 자긴 책을 안 좋아해서 그런 선물 받으면 너무 부담스러울 것 같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내 마음에 왜 그렇게 비수를 꽂았나 (ㅋㅋ) 팩트로 폭행을 했나 (ㅋㅋ) 싶지만 백번 천 번 맞는 말이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일에 대해, 상대방이 이렇게 반응해줬으면- 이라는 욕심을 부린다면 그건 잘못된 일이다. 물론! 내가 원하는 대로 반응해주고 서로 고마워하고 더 긍정적으로 흘러가면 좋지만 그건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아저씨가 할 일 없는 일요일 아침의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여하튼 현재의 내 얘기로 돌아가자면 나는 내 마음대로 만들어내는, 주변 사람에 대한 서운함을 이제 멈추려고 한다. 다 내 뇌피셜로 만들어낸 서운함을 멈추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려고 한다. 얀처럼 여유 있는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줄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상대방에게 내 잣대를 들이대지 않아야겠다. 평소에 이렇게까지 오래 생각에 빠지는 스타일은 아닌데.... 자가격리 때문에 혼자 생각이 많아졌고(ㅋㅋ), 내 생각의 흐름을 따르다 보니 글이 길어져버렸다.
마지막으로 오늘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아저씨 기도문을 남기고 총총 사라져야겠다 (특정 종교는..없지만 이 분이 쓴 글이 너무 좋아서 내 브런치 글에 박제!)
“주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