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예뻐서 속상한 1인
이런 질문이 흔할 때가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하세요?”
나이가 들수록 낯선 사람보단 낯익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늘어나고, 누군가를 새로 알아갈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일까? 저런 질문을 받아본 지 꽤 오래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새로운 계절이 시작될 때면 나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언제일까? 지금?’
그 질문에 대한 (근래의) 확실한 대답을 찾았다. 바로 작년 가을, 내 라이프 쏘울 메이트 절친 유진이와 함께 떠난 공주 여행에서.
가을은 공기부터 풍경, 온도와 습도가 모두 완벽한 것 같다. 아침에 밖을 나서면 느껴지는 쾌청한 공기, 그리고 맑다못해 시릴 정도로 푸른 하늘.
공주 여행 사진첩을 다시 둘러보니 그때 어떤 한옥마을에 가서 무료로 족욕했던 기억도 떠올랐다. 정말 발가락이 부루퉁퉁 다 불어버린 라면사리가 될 정도로 오래 족욕을 즐겼다. 얼굴과 상체는 살짝 추운데 다리는 뜨뜻하니 얼마나 행복하던지. 유진이랑 둘이 수다 떨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지. 또 가을 공주 여행 가고 싶은데 이 배신자유진쓰는 지지난주에 다른 친구랑 댕겨왔다 (갔다와서 감기로 아팠다길래 나 두고 가서 그런 거 같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10월 마지막 날 31일, 주 40시간 근무시간 기준 내가 반드시 채워야 하는 근무 시간은 4시간 반뿐이라 여유롭게 10시에 출근했다. 9시 22분 기준 대항병원 앞 아무렇게나 찍은 하늘과 풍경이 이 정도로 예쁘다면, 말 다하지 않았는가?
길가를 지날 때 알록달록 떨어지는 낙엽도 너무 예쁘다. 낙엽이 후두둑- 하고 길거리를 휩쓰는 소리도 예쁘다. 가을의 나무를 보면 작년 공주 여행의 행복한 기억이 떠올라 더 행복해진다. 말도 안 되게 좋았던 날씨, 눈 뜨면 보이는 모든 풍경이 예뻐 놀람을 금치 못했던 시간들.
마치 소개팅에 나온 상대방의 외모로 비유하자면, ‘가을‘은 탑급으로 예쁘게 생겨서 내가 바로 뿅- 내 스타일이야! 라고 외칠 것 같은 외모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아 (주의: 좋아하는 것엔 꽤나 호들갑스러운 편)
근데 가을이 너무 예쁘고 좋으니까 짜증도 난다. 이 예쁜 풍경을 고작 길어야 한 달밖에 더 못 보는 거야? 화담숲 예약하기가 웬만한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만큼 어려울 정도로 가을은 우리에게 완벽한 풍경을 선사하는데 그 시간이 너무 짧다. 시간이 너무 짧다는 사실에 살짝쿵 화가 난다.
마치 나의 올해 같다. 너무 행복하고 좋은데 그렇다 보니까 빠르게 지나가는 시간이 그저 아쉽다. 작년엔 지독한 아홉수를 겪었다. 원숭이띠가 작년부터 내년까지 삼재라던데, 삼재가 꼭 인생의 슬럼프를 의미하는 건 아니고 누군가에겐 호(좋을 호)삼재라는 것도 있다던데 난 악삼재(?)을 씨게 겪었다. 매월 고객과 소통하기 찐으로 좋아해서 SNS 이벤트를 열어주는 브랜드처럼, 매월 나에게 최악의 이벤트를 선사한 2022년이란 놈.. 연초부터 할머니 일로 온식구가 뒤집어질 만한 일이 있었고 원하는 곳으로의 이직에 실패했고(대신 팀 이동을 시켜줬다) 목 디스크로 너무너무 아픈 몇 달을 보냈고 크고 작은 갈등/다툼, 그리고 꽤 큰 변화가 있었다. 10월 공주 여행은, 그 최악의 시기 중 꼽사리 껴있던 여행이었는데 정말 최악의 사건들이 꽤 지나가고 이제 비로소 안정을 찾은 줄 알고 충만히 즐긴 여행이었지. 그 여행 뒤에도 몇 가지 불행이 남아있었는데 그래도 그 여행 당시엔 몰랐다. 그래서 좋았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지나고 등장했던 계절이라, 짧지만 너무 행복한 기억이 응축되어있는 계절이라 그런지 작년의 가을을 무척 사랑하게 되었고 그 마음은 올해 봄, 여름을 겪으면서도 유지되고 있다. 봄과 여름이 서운했다면 미안. 가을이 다시 돌아오니 꽤나 행복한 기분?
내년이 마지막 삼재라던데 제발 무탈하게 흘러갔으면 좋겠다. 벼락 부자 되게 해주세요- 같은 건 꿈에도 꾸지 않을 테니 매일매일 좌절하지 않을 정도로, 평온하고 충만하게 매 계절을 즐길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내년 가을을 무사히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선, 올해 남은 가을을 더 즐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