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어버린 순간에 대한 기록. 다들 어떻게 길을 찾아가는 걸까.
갈피를 잃었다.
갈피를 잡은 적이 있었던가.
나는 어릴 때부터 누군가 되고 싶은 직업이나 꿈이 있냐고 물으면 그 대답이 항상 바뀌었다. 진학할 대학과 전공을 정할 때에도, 친구들은 자기 전공을 하나둘씩 정하는데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우린 모두가 다 같이 수동적인 주입식 교육을 받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어떻게 저렇게 하고 싶은 일을 정한 거지. 나만 남겨진 기분이었다. 그래서 자유전공학부에 지원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그랬다.
그러다 어떻게 전공은 정했는데, 졸업할 때까지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고 싶은 일은 너무 많았다. 혼자 해외에서 살아보기도 하고, 봉사활동, 동아리 같은 대외활동을 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명확하게 딱 하나, 그걸 고르지 못했다. 하날 골라서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야 하는데, 그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우연한 계기로 지원한 회사에 합격하여 첫 회사에서 7년을 일했다. 일은 재미있었지만 회사에서 미래가 보이지 않아 다른 일을, 다른 미래를 그리고 싶어 퇴사를 결정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은, 퇴사만 하면 할 일이 무궁무진하고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퇴사를 하고 나니 어떤 일이든 할 수 없었다. 앞으로 무얼 하고 싶은지 정하고 가고 싶어서 멈췄었는데 도저히 정할 수가 없다. 아직도 멈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아니 약간은 주저앉은 채로.
다른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하고 싶은 일을 정하고 그 길로 계속 가는 걸까. 아주 어릴 때 정한 일인데 한 번도 한눈팔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가던 길을 묵묵히 가는 걸까. 이직하는 사람은 많이 봤지만 나처럼 몇 년을 다니다 갑자기 다른 일을, 다른 산업을 가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나도 하던 일, 하던 산업, 아는 것을 하고자 하면 금방 입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럼 멈춰 선 의미가 없다.
방향을 정해야, 목적지를 정해야 그 길을 꾸준히 가고 준비를 할 텐데 나는 언제까지 길을 잃은 채로 남아있을까. 이 길은 누가 정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안에 있는 길을 내가 꺼내야 한다.
퇴사를 하고 보니 정말 많은 일을 맡아서 했었는데 지표화 하려고 하니 아무 일도 안 한 것만 같다. 나는 너무 회사를 편하게 다녔다. 그러니까 회사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는데, 평생 이 회사에 남아서 이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면서 기록을 남겨두거나 미리 준비를 하거나 자료를 남겨두질 않고 그냥 일했다. 남들은 다 치열하게 사는 동안, 재직 중에도 이직하는 동안 나는 너무 이상적으로 살았다. 나는 평생을 이상주의자로 살다 갈 것 같다.
두 가지 방향성이 있다.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하면 작은 규모이지만 좋은 사람들과 익숙하고 아름다운 것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 장점은 스트레스를 비교적 덜 받는다는 것, 큰 노력 없이 입사할 수 있다는 것 (과연...?), 내가 좋아하는 잔잔하고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질 것 같다는 것. 단점은 성장, 지속 가능성, 미래 이런 것들을 모른 척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시간이 지나도 내 삶은 비슷할 거라는 것. 내 공간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고 나는 늘 이대로 있어도 되나 고민할 거라는 것, 언제든 다시 지금처럼 멈추고 뒤돌아보게 될 수 있다는 것.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고 자리를 박차고 미래를 위한 길을 선택한다면? 당장은 내 삶이 없다. 나는 노력해야 하고, 늦깎이 수험생처럼 공부해야 하고, 필요에 따라 수업을 들어야 하고, 그러려면 아르바이트라도 하면서 준비해야 해서 취준생 생활이 길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경쟁력이 없어서 작은 회사에 겨우 겨우 나중에서야 들어가야 할 수도 있다는 것.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픈 일을 해야 한다는 것, 하고 싶지 않은 일, 그렇지만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 그러면서도 계속 공부하고 발전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한다. 장점은 발전한다는 것, 지속 가능하다는 것, 미래엔 조금 더 큰 규모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내 삶이 조금 나아질 거라는 것, 앞으로는 다시 또 크게 길을 잃지는 않을 거라는 것.
후자를 생각하고 알아보는데 전에 없던 스트레스가 나를 잠식시킨다. 숨이 막힌다. 세상에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막막함이 앞선다. 너 이거 진짜 이 정도로 하고 싶은 것 맞아? 평생은 아니어도 당분간 계속 이 길을 가야 하는데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자꾸 되묻게 된다. 그만 둘 때는 정말 처음부터 시작할 마음이었다. 내가 원하는 바가 있다면, 그게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면, 기꺼이. 기꺼이 다 버리고 처음부터 시작하려고 했다. 구직활동을 하면서, 도저히 경력을 다 버리고 처음부터 시작할 엄두가 안 나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잘 모르겠다. 삼십 년 이상을 같이 살았는데 아직도 난 내가 원하는 걸 모른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글이니 도움이 되는 이야기, 기분 좋아지는 이야기를 적으려고 했지만
이 또한 지난 일이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적는 솔직한 현재의 상황.
방황하고 있다. 이 방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지만
한가운데서 기록을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