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간을 잘 쓰기 위한 고찰
여행을 다녀온 후, 내가 가장 낯설었던 건 나의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라는 사실.
살면서 한 번도 없었다.
학교를 다니고, 대학 졸업 후에도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눈치 보며 취업 준비를 했었고, 그리고 회사까지. 늘 내 시간은 다른 누군가에게 저당 잡힌 채, 나는 남은 시간만을 썼다. 물론 생계를 위한 등가교환이었지만. (등가가 맞았을까..) 퇴사 후에도 계속 학원을 다녀서 남는 시간을 쓰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24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 된 나는, 한 번도 시간을 다 써본 적이 없어서 넘쳐나는 시간을 쥐고 다 새어나가는 줄도 모른 채 서있었다.
처음엔 여행의 여파로 잠시 쉰다며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루를 모두 구직활동에 가져다 바쳤고, 온갖 스트레스에 사로 잡혔다. 이대론 안된다고 생각해서 내가 내린 솔루션은 이러하다.
1) 루틴을 만든다.
2) 하루 계획을 세운다.
둘이 비슷한 이야기지만 1번에서 2번으로 가는 과정이었기에 나눠서 설명해 본다.
처음엔 루틴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의 시작은 문제의 직면, 분석, 파악이다. 나는 하루를 효율적으로 쓰고 싶었다. 취업을 해야 하는 건 맞지만 내 하루도 소중했다. 조금 느리더라도 행복하게 가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라는 사람은 그렇게 몰아붙인다고 효율이 높아지지 않는다. 달래가면서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며 사용해줘야 한다. 요새 나와 부쩍 더 친해진 느낌이다. 나 사용법을 하나씩 익히는 중이다.
우선 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아침형 인간이 무조건 좋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건 아니다. 나 자체가 오전에 무얼 하기를 좋아한다. 일어나서 러닝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것도 생각했는데 일단 루틴을 잡기 위해선 내가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일찍 일어나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아침 일찍 일어나 책을 읽기로 했다.
아침 6시에 기상한다.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간단히 세수를 한다. 물을 끓여서 차를 내린다. 내린 차를 가지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다. 소파 뒤 창문은 조금 열어두고 블라인드를 걷는다. 그러면 아침의 차가운 공기와 새소리가 들린다. 조명은 너무 밝지 않게 어둑하게 켜두고, 창문에서 새어드는 빛을 느낀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자면 여름방학을 맞이한 느낌이다. 예기치 못한 평화로움을 마주했을 때 너무 행복해서 혼자 웃음이 났다. 그래, 인생 뭐 있나. 책이 너무 잘 읽혔다. 좋아하는 문장은 메모장에 적어둔다. 그러니까 더 잘 읽힌다. 이 김에 궁금했던 책들을 평소에 도서관으로 예약해 둔다. 예약된 책이 도착했다고 연락이 오면 슬슬 동네 산책하듯이 나가서 책을 빌려가지고 온다. 그게 참 뿌듯하고 알차다.
그렇게 매일을 반복하니 루틴이 되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차를 마시고 책을 읽기. 하루가 조금씩 잡혀가는 느낌이 들었다. 욕심이 났다. 하루 전체를 루틴으로 만들어볼까.
나는 비계획형 인간이다. 계획이라는 걸 세워본 적이 없다. 누군가의 성실한 모습을 보고 동요해 플래너를 구매해 본 적은 있지만 늘 시들해졌다. 그래도 (돈 받고) 해야 할 일은 무조건 하는 편이라 회사에서 동료들은 나를 엄청난 계획형 인간으로 알았었다. 마침 여름방학 같은 김에, 방학계획표 짜듯이 하루 계획을 세워보자.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 챗gpt와 머리를 맞대어 본다. 여러 대화 끝에 계획표가 탄생했다. 손으로 직접 글씨를 적어 계획표를 만들고 냉장고에 붙인다. 이제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기까지 나의 하루가 시간단위로 정해졌다. 의도적으로 여유롭게 짰다.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들은 최대한 오전-낮 시간으로 몰고 저녁 먹고 나서부터는 거의 자유시간이다. 너무 빠듯하지 않아서 그런지 재미있었다. 효율적으로 시간을 배분하니까 오히려 구직활동 하는 시간이 너무 금방 간다. 오전에 조금 집중하고 나니 벌써 자유시간이다. 죄책감 없이 맘껏 책도 읽고 영화도 볼 수 있다. 내가 이렇게 계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나. 철이 든 건지 아님 내가 직접 짠 효율적인 계획표가 설득력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계획표대로 하루를 보내니, 심심할 틈이 없다. 남는 시간이 없어서 바쁘다. 집에서 거의 안 나가는데 굉장히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이번 퇴사 후 자발적 갭이어 기간이 내게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가져다준다. 이렇게 새로운 나를 또 발견한다.
2024년 7월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