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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직장인으로

나에게 너무나 가치 있었던 8개월 반의 경로 재탐색 시간을 돌아보며

by 젊은 느티나무

이제 다시 직장인의 삶으로 돌아간다.

퇴사를 하고, 약 8개월 반 정도의 시간을 무소속의 삶으로 보내면서 나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고 그 시간들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돌아보기로 한다.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그 긴 시간을 쉬지 않고 직장인으로 살았는데도, 단지 8개월 쉬었다고 직장인의 삶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인간의 삶이란 어떠한가. 하루 24시간 중에 8시간을 일하고, 8시간을 자고, 8시간이 자유시간인데 사실 그 8시간 동안 씻고, 먹고, 이동하고, 자유롭지 않은 시간들이다. 잘 자려고 열심히 버는 건가 싶다. 내가 누군가에게 방해받지 않는 내 공간에서 걱정 없이 자려면 그만큼의 시간 동안 노동을 해야 하는 건가. 그런데 노동을 멈춘 삶은 어떨까.


노동을 멈춘 나는, 예상한 것처럼 행복했다.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붙잡고 씨름했던 두 달을 제외하면 내내 행복했고, 사실 구직 집중 기간에도 내 삶이 나름대로 정돈되어 몸과 마음이 튼튼했기 때문에 재정적인 문제만 아니었다면 아르바이트하면서 장기적으로 해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만큼 자유를 추구하는 내게는 너무나 자유롭고, 그래서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만나고 싶으면 만날 수 있었던 시간들. 그 속에서 나를 채운 건 뭘까.


우선, 내 시간을 주체적으로 보내고 일상을 정돈하는 법을 배웠다. 회사를 다닐 땐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고, 출근해서 일하다 퇴근하면 저녁. 저녁 식사를 하면 잘 준비를 해야 한다. 내 시간이지만 내 것이 아니었다. 회사를 다니지 않으니 시간이 흘러넘쳤다.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시간을 보면 오후 2시였다. 흘러넘치는 시간을 정돈하는 법을 배웠다. 하루의 루틴을 정하고 해야 할 일의 순서를 정했다. 난생처음으로 계획형 인간으로 살았다. 그러니 시간을 허투루 보낸다는 자괴감을 덜 수 있었고, 실제로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취미 생활과 해야 하는 일의 밸런스를 잘 찾을 수 있었다. 나는 하루 12시간씩 앉아있는, 이른바 '엉덩이 싸움'에서 늘 패자인 사람이다. 산만하고 한 군데에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잘 못한다. 하루종일 틀어박혀서 구직활동만 해야 했다면 나는 미쳐버리거나 아무 데나 취직해 버렸을 거다. 나를 파악해야 한다. 남들처럼 하다가는 아무것도 안된다. 그래서 놀 시간을 주고 공부할 시간도 적절히 가졌다. 나를 달래가면서 구직활동을 시켰다.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곳들을 탐험했다. 단골 가게가 생기고, 동호회 사람들과 친해져서 여행을 가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동네와 지역들을 군데군데 돌아다녔다. 그리고 정말 많이 배웠다. (실제로 수업도 많이 들었다.) 원래도 좋아했지만 평일 낮의 한산함을 맘껏 느꼈다. 엄청나게 걸어 다녔다. 기분 좋게 쏘다녔고 영화도, 책도 무척 많이 봤다. 하고 싶은 건 다했다. 거칠 것이 없었다.


궁극적으로, 내가 어떤 곳에서 일하고 싶어 하는지, 어떤 일이 하고 싶은지, 내가 그리는 미래는 어떤 모양인지를 골똘히 생각해 보게 되었다. 누구나 원하는 대기업에 들어가 보장된 미래를 가지고 싶은 줄 알았다. 물론 가지고 싶다. 그런데 그곳에서의 내가 그려지지 않는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치열하게 경쟁해서 대기업에 들어가고, 또 그곳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모습은 되고 싶다가도 숨이 막히기도 했다.


아르바이트를 한번 안 하고 퇴직금과 모아둔 돈으로 긴 유럽여행과 생활비를 사용하느라 정말 말 그대로 탕진 상태이지만, 나는 이번에 내가 쉬지 않고 바로 이직을 했더라면 정말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이고 내 삶의 부피감이 적어도 몇 겹은 줄어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정신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많이 성장하고 성숙해졌다. 삶의 태도를 바로잡았다.


사실 앞으로 이제 나는 이 길로 가겠어,라고 정해진 건 아니다. 그렇지만 가던 길에서 방향을 틀었고, 새로운 길로 도전하게 되었다. 잘 쉬었고, 다시 걸어가 본다. 잘 놀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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