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은 1954년에 탈고한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에서도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는 유물론과 유심론, 물질과 정신, 생활과 예술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해야 한다는 다원주의적 사유를 제시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비”가 그친 후 어느 날에 자신의 방 안에 “설움”이 충만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비가 그쳤으니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의 피로와 설움(「긍지의 날」)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날이 개면 논밭을 갈고 비가 오면 글을 읽는다는 청경우독(晴耕雨讀)이라는 말처럼 이제 비가 그쳤으니 다시 설움을 감수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오고 가는 것”이 “직선”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뜨리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도 비가 오는 날의 정신적 시간과 비가 그친 날의 물질적 시간이 교차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은 비가 오고 그치는 시간적 상황에 따라 물질적 생활과 정신적 가치 사이를 횡단하면서 긴장을 추구하는 다원주의를 실천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어지는 “설움”이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는 말도 지금은 비가 그쳤으니 설움을 감수하면서 돈을 버는 시간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여기서 설움은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는 자기 갱신의 방편이자, 안주하지 않으려는 실존적 고뇌”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서 감수해야 할 현실적인 설움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시인으로서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 즉 돈을 벌기 위해 설움을 감수하는 것이 “우둔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물질적 생활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설움을 감수하는 것은 자신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설움을 감수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이므로 정신과 마찬가지의 중요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으냐”라고 시상을 전환하면서 방안에 있는 또 다른 “시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 속에는 “푸른 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같이 “흰 단추”가 달려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푸른 옷’은 푸른 죄수복처럼 인간을 구속하는 물질적 생활을 상징하고, ‘흰 단추’는 1954년 11월 30일자 일기에서 “생활을 찾아가자. 나의 길 앞에 원자탄보다 더 무서운 장애물이 있으면 대수이냐! 지금이야 말로 아깃자깃한, 애처로운, 그리고 따스하고 몸부림치고 싶은, 코에서 유황 냄새 같은 것이 맡아 오는, 와사등 밑에 반사되는 물체처럼 아련하고도 표독한 생활을 찾아가자. 자유는 나의 가슴에 붙은 흰 단추와 같다.”(682)라고 썼듯이 초월적인 자유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비 오는 날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시간으로서 반짝이는 별을 볼 수 있는 “밤”을 제시하고 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는 말처럼 낮에는 물질적 생활을 위해 애쓰다가도 밤에는 정신적 생활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그가 “시간과 함께”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것이며, “나의 시야에서 멀어져가는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제시하는 “한 자루의 부채”도 부채살처럼 확산되어 가는 우주적인 “정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는 “하나의 가냘픈 물체”, 즉 물질문명만이 아니라 우주적인 정신도 함께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밤”에는 “고요한 사상”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리고 “시간 위에 얹고 / 어려운 몇 고비를 넘어가는 기술”, 즉 청경우독(晴耕雨讀)이나 주경야독(晝耕夜讀)처럼 시간적 상황에 따라 물질적 생활과 정신적 생활의 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통해 양극단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하는 다원주의적 생활을 “확실한 자신의 생활”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물질적 생활과 정신적 생활을 모두 긍정하면서 비오는 날과 개인 날, 낮과 밤 등 시간의 기술을 통해 양극 사이에서 긴장을 추구하는 다원주의적 생활을 실천하고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 연에서 그가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에 빈 방안에서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보려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흰 단추”, “부채”, “고요한 사상” 등으로 상징되는 정신적인 가치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주경야독이라는 다원적인 시간의 기술을 통해 낮의 설움을 보낸 후인 밤에는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자신의 생활임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방안에서 익어가는 설움」(1954)
비가 그친 후 어느 날―
나의 방 안에 설움이 충만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오고 가는 것이 직선으로 혹은
대각선으로 맞닥뜨리는 것같은 속에서
나의 설움은 유유히 자기의 시간을 찾아갔다
설움을 역류하는 야릇한 것만을 구태여 찾아서 헤매는 것은
우둔한 일인 줄 알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이며 생명이며 정신이며 시대이며 밑바닥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아아 그러나 지금 이 방안에는
오직 시간만이 있지 않으냐
흐르는 시간 속에 이를테면 푸른 옷이 걸리고 그 위에
반짝이는 별같이 흰 단추가 달려 있고
가만히 앉아 있어도 자꾸 뻐근하여만 가는 목을 돌려
시간과 함께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것
그것은 혹시 한 자루의 부채
―그러나 그것은 보일락말락 나의 시야(視野)에서
멀어져가는 것―
하나의 가냘픈 물체에 도저히 고정될 수 없는
나의 눈이며 나의 정신이며
이 밤이 기다리는 고요한 사상마저
나는 초연히 이것을 시간 위에 얹고
어려운 몇 고비를 넘어가는 기술을 알고 있나니
누구의 생활도 아닌 이것은 확실한 나의 생활
마지막 설움마저 보낸 뒤
빈 방안에 나는 홀로이 머물러 앉아
어떠한 내용의 책을 열어 보려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