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의 범주가 아닌 그 사람 자체를 칭찬하기
나는 글씨를 잘 쓰는 편이다.
언제, 어딜 가든 자필로 뭔가를 써야 하는 순간마다 “와, 글씨가 너무 예쁜데요?”, “컴퓨터로 쓴 줄 알았어요.” 하는 말들을 거의 매번 듣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질문은 “언제부터 이렇게 잘 쓰셨어요?”, “글씨 연습 따로 하시는 거에요?” 등이 있다. 사실 언제부터 잘 썼는지 난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글씨의 심미성을 살리고 싶었던 마음의 시작은 정확히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때부터였고, 그 때 이후로는 글씨체를 더 빠르게 쓰거나 잘 쓸 수 있는 방식으로 조금씩 변형 시켜가며 꾸준히 훈련해 왔다.
분명 8, 9살 때 까지만 해도 글씨를 잘 쓰는 것에 대한 욕심은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10살이 된 초등학교 3학년 1학기, 어떤 얌전한 A라는 남학생과 같은 반이 되면서부터 나의 글씨체 인생에는 크게 변화가 시작되었다. 공부도 잘 하고 책 읽는 것도 좋아하고 성격도 차분하다고 어른들이 좋아하던 그 아이. 처음에는 나와 캐릭터 겹치는 게 싫어서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A가 가장 많이 칭찬 받는 영역이 글씨체라는 것을 깨닫고, 그 아이의 글씨체를 최대한 많이 살펴 보았다. 필기나 숙제해 둔 노트가 보이면 재빨리 몰래 들여다 보고, 얘는 글자 ‘않’자를 이렇게 쓰는구나, ‘됐’자는 이렇게 쓰는구나, 하면서 관찰했던 기억이 난다. 네모 반듯반듯하게 마치 칸 안에 들어가서 쓰는 듯한 특유의 글씨체가 마음에 들어 나도 그 때부터 글씨를 예쁘게 쓰기를 연습했었다.
그 뒤로 학년을 거듭하며 내 글씨체는 점점 다듬어져 갔고, 과도기였던 6학년 (이 때 글씨체는 내가 봐도 멋만 잔뜩 들었지, 잘 쓴 글씨체는 아니었던 때) 을 지나 중학생이 되었다. 그 때 또 우연히 교과서를 빌렸던 옆 반 학생의 글씨체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고, 이번엔 그 글씨체를 따라 쓰면서 연습을 하며 또 한 번의 격변을 맞았다. 그 뒤로 내 글씨체는 누가 봐도 또박 또박 잘 쓴 글씨체가 되어 갔다. 성인이 된 이후, 어디 운동 센터에 등록을 하러 가더라도, 병원에 진료 접수를 하러 가더라도 항상 따라 다니던 “글씨를 되게 잘 쓰시네요”라는 칭찬들은 어느새 내 삶의 일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학생 시절에도 어느 순간부터 어쩐지 이상하게 여겨졌던 부분이 있었다. 내 생활 기록부에는 <글씨를 또박 또박 쓰고 그림을 잘 그리는 등 여성스러운 면이 많음> 따위의 문구가 적혀졌고, 내가 일기장이나 노트에 쓰는 글씨를 보고 주변 어른들은 “역시 여자애들이라 글씨를 잘 쓰네.” 등의 평가를 칭찬과 함께 내밀었다. 나는 분명 초등학교 3학년 시절 A라는 남학생의 글씨체를 보고 자극받아 연습을 시작했는데 말이다. 또 A를 보고 어른들은 왜 “A는 남자앤데도 글씨를 되게 잘 쓰는구나.” 라고 칭찬을 했을까? 글씨를 예쁘게 쓰고 잘 쓰는 것은 ‘나’라는 사람의 강점이었고 특징이었는데, 어른들은 거기에 ‘여자애’라는 프레임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칭찬하는 것이 참 이상했다. 글씨를 예쁘게 잘 쓰던 A라는 친구 역시 자꾸 ‘남자앤데도’ 신통하게 글씨를 잘 쓴다는 방식으로 칭찬을 받았는데, 이를 이상하다 느끼진 않았을까?
나의 주 양육자였던 우리 엄마 역시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다. 엄마도 어딜 가면 글씨 잘 쓴다는 소리를 꼭 듣고, 노트 필기를 해 놓은 페이지는 항상 엄마의 자랑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가 보고 자랐던 엄마의 글씨체는 자연스럽게 내가 닮아가야 할 어떤 것으로 느껴졌다. 또박 또박 쓴 글씨는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았다. 대충 흘려 쓰는 듯한 다른 어른들의 글씨는 계속 봐도 잘 못 알아 보겠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잘 쓴 글씨를 보고 자란 나는 그냥 그렇게 잘 쓰고 싶었다. 이 모든 사고의 과정에서 ‘여자이기에’ 라는 부분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내 모든 글씨들은 ‘여성스럽고’, ‘역시 여자애들이 잘 하는’, 그런 영역 내에서 칭찬을 자주 받았다. 사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도 나는 글씨를 잘 쓴다는 칭찬이 항상 감사하고 기분 좋지만서도, 동시에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남자였더라면 이러한 특징에 분명히 매번 “와 남자분이 글씨 되게 잘쓰시네요” 라고 따라 붙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더. 내 여자인 친구들은 나와 종종 비교되곤 했다. 여자앤데 쟤는 잘 쓰고 누구는 이렇게 못 쓴다, 하는 식으로까지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나의 또박 또박한 글씨를 보고 “나는 절대 이렇게 못 쓰겠다”며 부러워하는 포지션은 항상 여자인 친구들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 어떤 남자로부터 “와 나는 그렇게 못 쓰는데, 부럽다. 나도 잘 쓰고 싶다.”는 류의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글씨를 예쁘게 쓰는 것은 이 사회에서 남성에게는 지켜져야만 하는 덕목이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어떤 능력치를 갖고 있을 때 그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 그 능력치가 어떠한 특정 카테고리 범주에 속한 사람들에게 주로 강요되는 어떤 덕목인지를 알 수 있다.
아마도 내가 글씨를 잘 쓰는 것에 관심을 가졌던 그 순간부터, 아니면 그 이전부터, 나는 스스로 이 사회에서 ‘여자’를 담당해 역할해 오던 사람이라고 자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고, 태어난 가정으로부터 사회화되는 최초의 그 순간부터 여성의 젠더롤, 그런 것들에 대해 미묘한 틀 안에 서서히 끼워진 채 자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에 대해 내가 여성이라고 자각하고 성역할을 하던 중이기 때문에 ‘글씨 잘 쓰기’에 관심을 가졌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나라는 사람은 뭐로 태어났어도 글씨를 잘 쓰는 것에 관심을 가졌었을지, 평행세계가 존재하지 않는 이상 정확하게 그 뿌리를 알 수 있는 길은 영원히 없을 것이다. 적어도 확실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시절, A라는 같은 반 ‘남학생’의 글씨를 본 이후로 나도 글씨를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을 처음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과연 그것은 나의 어떤 본질과 맞닿은 욕망이었을까? 아니, 그것이 중요하긴 할까? 어쨌든 글씨를 잘 쓰고 싶었던 어린 나는 꾸준히 연습했고, 다 자란 지금도 글씨를 잘 쓴다. 그 출발점이 ‘무엇’이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떠한 본질과 연결을 시키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미음이가 여자라서 그러고 싶었구나, 아니야 쟨 그거랑 상관없이 남자였어도 그러고 싶었을거야, 이런 논지가 무의미하도록 그냥 지금의 내가 글씨를 잘 쓰는 것에 더 집중해 줄 수 있는 사회면 좋겠다.
이렇게 여자다운 것, 남자다운 것이라는 프레이밍에 갇히면 개인에게 칭찬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또 다른 비슷한 예시도 많다. 손재주가 좋은 사람에게 “역시 원숭이띠들이 손재주가 좋다더니, 그런가 보다.” 하는 것,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사람에게 “역시 어려서 그런지, 젊은 사람이 생각을 잘 해낸다.” 라고 칭찬하는 것들도 비슷한 사례다. ‘젊은 사람 다운 것’, ‘원숭이띠 다운 것’ 처럼 ‘여자답고’, ‘남자다운’ 맥락에서 어떤 개인의 능력치를 평가하고 칭찬하는 것은 그래서 이토록 어불성설이다.
나는 손재주가 좋은 편이다. 나는 그림을 곧잘 그리고, 글도 잘 쓴다. 글씨도 예쁘게 쓴다. 나는 곧잘 멋진 아이디어들도 떠올린다. 나는 실행력도 좋은 편이다. 이 모든 것들은 나다운 특징들이고, 나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징들이다. 하지만 이런 면들에 대해 남들이 나를 좋게 봐주는 것들은 감사한 일이지만, 가끔 칭찬에 서투른 사람들은 이것들에 대해 ‘여자라서’, ‘젊어서’ 등의 이유를 대며 칭찬하곤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멋진 면을 발견했다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어떤 특징에 따른 범주로 나눈 카테고리의 장점으로 (대부분 이 역시도 편견에 따른 것이지만,) 칭찬하지 말고,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에 특별하다는 맥락으로 칭찬해 보는 것은 어떨까? 당신이 하고 싶은 칭찬의 말은 어느새 상대방에게 더 큰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