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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아프리카를 여행할 것이라면, 구글에 검색을 해도 나오지 않는 (그런 지역은 생각보다 드물다) 시골을 여행하다 들어선 식당에서 익숙한 음식을 만났을 때 그것을 덥석 ‘옳다구나!’라는 식으로 맞이하는 것이 엄청난 실수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특히 간판에 아프리카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솜브레로*를 쓴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면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솜브레로 : 과장된 챙을 가진 멕시코 전통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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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에 있는 음식은 이름만 같은 허울일 뿐. 아프리카 사람들의 위벽과 입맛에 맞게 변형되어 실상 완전히 별개인 음식이다. 익숙한 이름으로 날조된 그것을 얼렁뚱땅 위장으로 삼키는 것은 정말이지 무모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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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내가 시킨 볼로네즈 파스타. 나는 이탈리아의 도시 볼로냐에서 직접 유서 깊은 ‘원조’ 볼로네즈 파스타를 먹은 행운의 여행객이었는데 식탁에 놓인 그것을 아무리 보아도 도저히 내 기억의 맥락에서 움직이는 음식이 아니었다. 퓨레는 온데간데없고 기름만 잔뜩 묻혀 고수로 가니쉬를 해 온 해괴망측한 음식은 내 기대를 완전히 배신했다. 자부심 넘치던 볼로냐 식당의 주인이 ‘당신은 요리를 할 자격이 없소’라고 외치는 소리가 부엌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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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원의 미소를 상관치 안고 그것을 테이블 끝자락으로 밀어놓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며칠 동안 찐 옥수수와 콩, 감자튀김만 먹은 나의 위장이 주인과는 반대로 그 정체불명의 음식을 강렬하게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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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수 없이 나는 그것을 간신히 파스타라고 자기 최면을 끝낸 후 카푸치노(카푸치노라는 이름을 가진 음료. 사실 우리는 밀크티를 주문했다)를 곁들여 우걱우걱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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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서 나오자마자 소화기는 불만을 쏟아냈다. 소화가 되지 않자 컨디션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무거운 가방 때문에 혈액 순환이 원활치 않았으며 6월 초입의 추운 날씨*가 소화를 더욱 어렵게 했다. 걸을 때마다 속이 메쓱거렸다.
* 6월의 케냐는 겨울의 초입에 놓여있었다. 동부 아프리카는 6월부터 춥기 시작해 8월까지가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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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엘과 모시에서 헤어진 후,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를 목적지로 모시를 떠나 맨발 이동과 히치하이킹을 하며 케냐의 카지도Kajiado 지역에 도착할 때까지 여행은 무척이나 수월했다. 하지만 ‘파스타’라는 음식을 먹은 그날 밤, 위기가 찾아왔다.
밤을 보내기 위해 도로에서 한참 떨어진 나무 아래 텐트를 쳐놓고, 나는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다르에스살람에서 여행을 시작할 때 다짐했던 최초의 기세를 잃어버린 채로... 울며 불며 토를 했다. 생에 처음 있는 거대한 싸움이었다. 손가락을 목구멍 깊숙이 집어넣어 식도 아래의 음식을 꺼내려고 하는 나는 헤밍웨이의 소설 속, 태평양에서 청새치를 잡으려는 노인과 서서히 유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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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다가 토하기를 수십 번을 반복했다. 얼마나 상태가 안좋았는지 속을 게워내다가 잠도 못잔 채 동이 텄다. 내 몸은 병원에 가야 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이 환해지자마자 우리는 병원에 가기 위해 히치하이킹을 시도했다. 나는 아스팔트로 기어가서 항복하듯 배를 드러내고 벌렁 누웠다. 차라리 딱 죽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가방을 메지도 못하는 상태라 닉이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며 텐트를 정리하고 가방을 챙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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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다행인 것은 히치하이킹을 하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신새벽의 도로 한복판, 맨발의 백인 하나와 맨발의 동양인 하나가 누워있는 아프리카 최초의 풍경을 본 차들은 모조리 멈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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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차가 도시까지 이동하지 않아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두 번째 차에게 방향을 물었다. 다행히 차는 나이로비 근처까지 향한다고 했다. 히치하이킹 최초의 여성 운전자였다. 강인해 보이는 그녀는 내 상태를 보더니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액셀을 밟았다. 이동하는 중간중간 차에서 내려 또다시 구토를 하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나이로비 한복판에 위치한 대형 병원에 도착했다. 얼떨결에 여정의 종착지인 나이로비에 도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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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간단한 검사라도 하려고 했으나 수속이 복잡한 걸 확인하고 우리는 그냥 쉬는 것이 낫겠다며 닉의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수중에는 한화로 오직 50만원 가량의 돈밖에 없었기에 3~5만 원대의 가격을 형성하고 있는 나이로비의 숙박료가 꽤나 부담스러웠다. 다행히 닉은 뉴질랜드의 봉사 프로그램으로 나이로비에 처음 왔을 때 알게 된 수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우리는 생각보다 이르게 쿠퍼라는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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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하니 꽤 많은 아이들과 쿠퍼가 망아지처럼 춤을 추며 우리를 반겼다. 미국에서 발레를 전공한 쿠퍼는 나이로비에 정착해 케냐 무용센터 예술단장으로 일을 하면서 슬럼가 아이들에게 발레를 가르치며 살고 있다고 했다. 성장한 친구들은 그녀의 조수가 되어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도왔으며 체계적인 그녀의 가르침으로 케냐 최초로 런던 왕립 발레단에 들어간 발레리노, 조엘 키오코를 배출시키기도 했다. CNN등 다수의 언론 매체에서 키오코와 쿠퍼에 대해서 다룬 적이 있으며 조엘 키오코를 따로 취재하는 한국 다큐멘터리 팀도 있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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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쿠퍼는 자신이 번 돈과 미국에서 기부를 받은 돈으로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의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 거의 아이들을 양육하다시피 살고 있었는데 정성을 넘어 그녀의 인생을 희생한다는 인상이 느껴질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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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인사를 간신히 나눈 후 나는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다행히도 며칠 사이, 편한 침대와 갖가지 비타민, 약, 따뜻한 온수 샤워를 누릴 수 있게 되자 소화기들이 빠르게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틀의 요양 후, 나는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었다.
몸이 궤도에 오르고선 바쁜 나날이 흘러갔다. 새로운 나라, 새로운 도시 나이로비에는 없는 게 없었다. 수개월 간 구경도 못한 다양한 음료와 음식, 서양식 빵, 커피를 걸신들린 듯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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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한국음식점에 가서 쿠파 집의 아이들에게 요리를 해 줄 라면을 사오다 우연히 식사를 하고 있던 주인 내외에게 발각되어 나이로비 한인 사회에 ‘맨발로 여행하는 머저리가 있데!’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는 바람에 여러 식당에 초대를 받아 닉과 함께 어마어마한 환대를 받았는가 하면 은박 구급 담요, 빨간약, 거즈와 붕대, 밴드, 비상약 거리를 산더미같이 선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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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고아원,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저자 카렌 블릭센의 집으로 가서 잠시 관광객으로 변모하기도 했으며 우연히 겹친 일정으로 탄자니아에서 같이 등산을 했던 켓과 베티나를 만나 식사도 했다. 쿠파가 교육하는 아이의 생일파티에 초대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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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비는 동물의 심장 소리를 가장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도시였다. 도시 안에 거대한 자연이 존재했다. 산책할 때마다 햇살을 받은 수풀들이 황금색의 후광으로 나를 유혹하였기에 항상 다짐한 시간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마치 공존이라는 개념 안에서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현대와 원시가 아우러져있는 나이로비. 극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