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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기환 Oct 14. 2020

그때부터 댓글을 쓰기 시작했다.

1주년

  텍스트가 사람을 찌른다. 10자를 겨우 넘기는 짧은 글이지만 실제로 사람은 상처를 받는다. 피는 나지 않는다. 속이 문드러질 뿐. 마음이 썩을대로 썩어버린 이는 죽기도 한다. 고작 10글자를 겨우 넘기는 텍스트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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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추모가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그녀가 몇 년 전부터 죽어있다고 생각했지만 반응을 보아하니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별로 없는 듯했다. 기사에 이름만 들어가도 수군수군, 인스타그램 어떤 사진이 올라와도 수군수군. 타인의 말에 목이 메인 채 사는 것이 살아있다고야 말할 수는 있겠다만, 그게 진정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하긴,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 믿지. 진짜 모습을 감추고 외피를 만드는 데 이미지만큼 적당한 게 없기도 하지. 그러니까 그녀의 멘탈이 튼튼하다고 소문이 자자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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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그녀는 화면 안에서만 존재한다. 현실에 없는 그녀가 농담을 던지고 웃으며 춤을 추는 것을 보니 괜스레 시퍼런 기분이 든다. 내가 보는 짧은 순간에도 게시물의 하트가 늘어난다. 사람들은 아직 그녀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그녀의 사진과 얼굴을, 말들을 붙잡고 자신들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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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 아래 달린 댓글들을 살펴본다. 곧바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폭력이 있다. 누가 봐도 폭력인 폭력과 이게 폭력인가 싶은 폭력. 폭력의 기준점이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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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게시물 아래 달린 댓글들은 두 부류의 폭력, 모두에 해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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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누가 봐도 폭력인 것들. 악플들은 다분히 자각적으로 쓰여있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자신이 쓰고 있는 말에 독이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손가락을 멈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달랐다. 나는 댓글을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바다 깊숙한 곳에 사는 물고기들이 떠올랐다. 햇빛을 피해 아래로, 아래로 향하는 물고기들. 어둠만을 좇다가 몸을 죄여오는 수압에 생김새도, 그 습성도 기괴해졌지만 어둠 때문에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보지 못하는 물고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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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이게 폭력인가 싶은 폭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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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니가 너무 보고 싶어ㅜㅜ 밤마다 언니가 꿈에 나와요

@ : 사랑해요 왜 그랬어요 아직도 안믿겨요

@ : 나는 보고 싶은데... 언니 왜 죽었어요? 왜 왜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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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댓글들은 그녀에 대한 애정을 꾹꾹 눌러 담아 쓴 말들일 것이다. 나는 저들이 사랑이라는 이유로 그녀에게 다른 형태의 감옥을 씌우지는 않았을까 상상해보았다. 왜냐하면 내가 유일하게 사랑에 대해 아는 사실이라곤 세상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에게 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한 인간이 품고 있는 무한한 심연과 우울, 아름다움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너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 말이 얼마나 대단한 말인지, 한편으로는 얼마나 무서운 말인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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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직업 특성상 어쩔 수 없다는 말도 이해는 간다. 그녀는 사랑스러워야 하며 사랑을 줘야하고 사랑을 받지 않으면 지속되지 않는,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직업을 가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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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만 한 번이라도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증오와 사랑은 등을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증오 없는 사랑도, 사랑 없는 증오도 없다. 그렇기에 상대방을 ‘적당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마냥 쉽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마냥 쉽고 아름답지만은 않은 것이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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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이 지나고, 그녀를 다시 만난 장소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이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학교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에 그녀와 마주쳤다. 조악한 나무 현판에 붙여진 그녀의 사진과 포스트잇, 앞에 놓인 꽃다발들을 보니 학생들이 마련한 작은 추모식인 듯했다. 색색깔 포스트잇에는 여러 메시지가 써져있다. 나는 걸음을 가까이 옮겼다. ‘너를 영원히 기억할게’, ‘OO야. 사랑했어. 그곳에선 잘 지내길’ 같은 말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다. 마침 불어온 바람에 포스트잇이 날아가버렸다. ‘쳇 너무 가볍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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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 앞에 놓인 꽃들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주인이 없는 꽃들. 꽃이 진 자리에는 이파리가 남는다지만 봄은 이미 떠나고 없다. 꽃이 없으니 벌도, 나비도 오지 않을 것이다. 죽으면 무슨 소용이람? 죽으면 무슨 소용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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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숙한 영정 사진을 눈앞에 두니 문득 세상에 그녀가 있었을 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운명이란 너의 힘으로 바꿀 수 있어. 주어진 운명을 너에게 좋은 쪽으로 끌어당기면 돼. 그러니깐 무엇을 하든지 운명론자가 되어 쉽게 단념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꼭 이루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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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생각했던 운명이 이런 식으로 끝날 것을 그녀는 진정 원했을까, 아니 상상이라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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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설적인 것은 그녀가 꿈꿔봤음직한 일들이 그녀가 떠난 후에야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칭찬한다. 착한 사람이라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댓글창 역시 못 본 사이 누군가 세탁이라도 한 듯 깨끗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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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죄라는 문제는 정말 간단치 않은 문제이다. 국가가 내린 합법적인 처벌을 받은 가해자들이 본인의 죗값을 모조리 치뤘다고 생각하여 피해자에게 일말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을 보아라. 그것이 진정한 속죄인가? 마찬가지로 저주 같은 댓글을 쓴 사람들이 자신들이 남긴 말을 지움으로써 자신의 죄까지 말끔히 지워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은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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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행동이 속죄가 아니라고, 나는 상처를 받았으며 당신들의 반성은 충분치 않다고 일침을 가해줄 당사자가 없으니 좋긴 하겠네. 그녀가 세상에 없으니 좋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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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갑갑하다. 하늘을 쳐다보고선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의자에 앉아 노트북 앞으로 목을 내밀고 있는 친구가 저 멀리 보인다. 가까이 다가간다. 인사를 건내려다 문득, 낙천적인 그녀가 웬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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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왜 그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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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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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면을 가리키는 그녀는 종이로 만들어놓은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프리랜서로 그림을 그리는 그녀는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을 유튜브에 찍어 올리고 있었다. 구독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꽤나 열심이라서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내고 있던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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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른쪽 얼굴이 이쁘신데 왜 왼쪽 얼굴만 보여주세요?

@ : 미대생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미대생이라고 하시기엔...

@ : 돈 받고 진짜 파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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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보고 있는 사람들은 댓글을 잘 달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것뿐. 그래도 무관심보다는 댓글이 낫지, 조회수는 늘어나고 있잖아 그게 어디야, 댓글에 상처 받지 말라는 말들을 하려다가 문득 도서관 앞에서 본 그녀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쳤다. 이것 역시 다른 형태의 방관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상실로 이미 경험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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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봐도 폭력인 폭력이 있고 이게 폭력인가 싶은 폭력이 있다.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게 우리의 인생이라지만 나는 더 이상 방관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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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부터 나는 댓글을 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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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있습니다.

정말 좋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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