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쟁 Apr 28. 2022

약속

봄이 왔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었다. 머리를 감고 다 말리지 못한채 아파트에 산책을 나왔다가 폭풍 전야처럼 몰아치는 바람에 머리가 부풀어오르고 샴푸 냄새와 푸근한 봄의 공기가 한데 섞이는 것을 느꼈다. 올해도 봄이 어김없이 왔다. 매해 새해 달력의 첫 두장을 내리 찢은 자리에는 오늘처럼 봄이 온다. 작년 5월쯤 더운 공기에 밀려떠난 봄이 수박이 익고 소나기가 내리고 단풍이 들고, 흰눈이 펑펑 쏟아지는 동안 기다렸다가 다시 왔다. 약속을 잘 지키는 계절의 순환은 모든 것을 면밀하게 준비하며 자기 차례를 기다려온것만 같아 보인다. 겨우내 잿빛이던 잔디의 색도 연둣빛으로 물들었고 하늘도 창백한 민낯에 생기를 더하고 있다. 한뼘이나 더 자란듯한 어린아이의 짧아진 바짓단도 지켜낸 약속의 보상처럼 빛이 난다. 봄이 왔다, 만물을 창조하신 이의 약속과 이 계절이 허락한 새로운 만남 앞에 서니 반복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잊혀진다. 마지막 한 줌 거센 바람에 겨울 끝을 몰아가며 대지가 따뜻하고 발그레한 얼굴로 데워지고 있다. 숨쉬는 모든 것들에 다시 살 기회가 주어졌다. 계산없이 살고 싶어진다. 

작가의 이전글 길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