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거 아닌 일에 속상해서 기분이 가라앉을 때가 있다. 20대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감정 기복이 심했다. 나의 갑작스러운, 그러나 자발적이었던 해외에서의 독립 때문이었을까, 당시의 나는 제2의 사춘기라 할 만큼 고달프고 우울했다. 승무원이라는 직업군 덕분에 나는 세계 각국의 음식을 쫓아다니는 것으로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두리안, 각종 향신료, 겉은 맨질맨질하고 촉촉한 바게트와 육즙이 흐르는 양고기... 아티초크와 청어 절임, 어린 코코넛을 얼려 간 음료와 포멜로... 캐비어와 각종 블루치즈. 새로운 음식을 먹고 익숙해지고 좋아하게 되는 일은 당시 내가 겪어야 했던 일상의 어려운 일들 또한 '먹어치우듯' 헤쳐나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되기도 했다. 첫째 아이를 임신하고 나서 한창 입덧을 할 때 인도 카레가 생각나던 것은 위기의 순간마다 일단 먹는 것으로 대처했던 예전의 습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습관을 우리 엄마가 전해줬다고 믿었다. 사춘기 시절 집안의 폭탄 같았던 나는 온종일 짜증을 내고 분노했는데 엄마는 그런 나를 나무라시기도 했지만 주로 '먹였다'. 한때는 그런 엄마가 원망스럽고 속상하기도 했다. 내 판타지 속의 엄마란 사람은, 딸이 신경질을 내고 짜증을 부리면 밥을 주지 않고 억지로 앉혀서라도 이성을 되찾게 대화를 시도하는 그런 세련된 사람이어야 했다. 아니 차라리 드라마 속 엄마들처럼 어리석은 딸년의 머리채를 잡기라도 바랐다. 그러나 나의 엄마 영희씨는 머리채는 커녕 등짝 한대 후려칠줄 몰랐고 오히려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이것저것 해대며 개수대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등만 보였다. 그런 엄마의 모습에 되려 화가 더 나던 나는 불다 놓쳐버린 커다란 풍선처럼 폭격하듯 엄마의 등에 별의 별 짜증을 다 쏟아냈다. 엄마는 그러다가 짜증 내다 지친 내게 엄마의 얼굴 대신 밥상을 내밀었다. 한솥 가득 끓인 돼지고기 김치찌개와 참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나물, 갓 구운 돌김과 깨를 뿌린 꼬막무침... 씩씩대며 아직 가라앉지 않은 속을 먹는 걸로 풀어야 했던 나는 밥 먹을 기분 아니라는 말을 침과 함께 꿀꺽 삼키며 속으로 무식한 엄마를 읊으며 밥을 먹었다. 나는 진짜로 하고 싶은 말 대신 화를 냈고 엄마는 하고 싶은 말 대신 밥을 지었다. 20년이 지나서야 내가 집에서 주로 보내는 곳이 부엌이 된 지 몇 년이나 지나서야, 그때의 엄마 마음이 알아진다. 너는 그런 일에 화를 낼 만한 사람이 아니야, 그런 걸로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엄마는 본인이 익숙하지 않은 말 대신 찰진 잡곡밥에, 나물에... 간이 잘 밴 기름진 돼지고기에 빼곡히 내게 주고 싶은 마음을 엎고 뒤지고 볶아내었다. 등짝을 얻어맞는 대신 밥상을 무한정 많이도 받아 먹은 나는 그때 먹은 김치찌개의 고춧가루에 뒤늦게서야 사래라도 걸린듯 찔끔 눈물이 난다.
무식한 엄마, 그렇다. 우리 모두는 내가 자녀였던 경험 말고는 아무런 것도 배우지 못한 채 부모가 된다. 내 엄마가 했던 말, 그 행동 하나하나를 뿌리처럼 여기며 거기에서 살아져 나온다. 엄마는 변변치않던 살림에도 할머니가 먹는 것 하나는 최고로 잘해주셨다며 자랑처럼 말했었는데 아마 그 최고의 것을 우리에게도 주고 싶으셨나 보다. 그래서 내가 건강한거야, 그래서 너도 안 아픈 거야 하시며 잘 해먹였던 것을 위안삼는 말 가운데에 먹이는 거 말고도 좋은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뭐든 다 했을 거라는, 엄마의 데일만큼 뜨거운 사랑의 목소리가 들린다.
막둥이를 유모차 태워 놀이터에 다녀오는 길에 앞치마까지 매고 바쁘게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는 중년의 여자가 지나갔다. 생선구이 냄새가 났다. 겉모습은 촌스럽고 약한 여자. 향수보다 음식 냄새가 나는 날이 많은 아줌마는 낡은 책처럼 보였다. 페이지 페이지마다 먹이느라 해가 저물어가는 그 모습이 귀하다. 죽어가는 사람도 먹이고 볼 우리 엄마 김영희, 그 손맛 덕분에 정말 내가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