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제 이준서 Aug 03. 2020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3차 공모전 주제를 듣고 잠깐의 고민을 하였다. 일상적이지 않은 주제는 항상 당황스러움을 수반한다. 일상적이지 않음은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일종의 숙제이다.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고민 끝에 결론 내린 것은 일단 그전에 나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나는 누구? 아니 무엇인가?

나는 육체와 보이지 않은 정신,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를 더 보탠다면 나를 둘러싼 물질을 합하여 육체와 정신, 환경이겠지만 여기서는 순수한 나(我, myself)에 국한시켜야 하므로 일단 육체와 정신 두 부분만 보기로 하자. 인간 신체구조를 검색하면
"인간의 몸은 세포들이 모인 조직, 조직들이 결합한 기관, 기관들이 서로 연계된 기관계로 구성되어있다. 세포는 인체를 비롯한 모든 생물의 살아 있는 기본단위이며, 인체는 75조 개 이상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이하는 개별적으로 검색하여 보자.

인간의 몸

자 문제는 보이지 않은 정신, 마음 더 나아가 영혼이라는 존재에 대한 고찰이다. 매추세츠 헤이브릴의 의사 던칸 맥두걸(Duncan MacDougall)은 영혼에 무게가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영혼이 몸을 떠났을 때 인간에게서 잃는 질량 측정을 시도하였다. 맥두걸은 죽음의 고비를 앞둔 환자 여섯 명에 대한 질량 변화 측정을 시도했다. 6명의 피실험자 중 한 명이 1온스 중 4분의 3(21.3그램)을 잃었다. 이 실험이 맞다는 가정하에서 보면 영혼의 물질 질량전체 인체중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아주 작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은 물질이라는 전제를 기본으로 한다. 실험의 의도는 좋으나 기본 전제 자체를 검증할 실증적 방법이 없다. 영혼의 본질은 생명을 지닌 존재에게 있어서 영원한 숙제와도 같다.

영혼은 존재할까

눈에 보이지 않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공기는 보이지 않으나 존재한다. 우리가 숨을 쉰다는 것 자체가 강력한 증거이다. 우리 사는 세계는 1차원 점, 2차원 선을 지나 3차원 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실 더 나아가면 시간이란 축이 더해진 4차원으로도 볼 수 있다. 차원은 한 차원 높을 때만이 인지할 수 있게 되는데 깊게 설명할 것 없이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휴대폰을 지금 나는 2차원적으로 보고 있다. 이 세상은 3차원의 세계이나 현재 나의 눈은 이 스마트폰을 3차원이 아닌 2차원으로 보고 있다. 무슨 말이냐고? 3차원으로 보려면 나는 이 휴대폰의 뒷면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무언가 확 깨달음이 오지 않는가? 피카소의 그림이 이해가 어려운 것은 4차원의 영감으로 3차원 세계를 표현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해진 4차원을 이해하려면 적어도 5차원적 공감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 쿠퍼가 도착한 5차원 공간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하나로 이어주는 공간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5차원 공간이 어떤 곳인지 인간의 두뇌로는 절대 이해하지도 그리지도 못한다. 이러한 제한된 인지능력을 가진 인간이 -양자물리학은 차원을 11차원으로 나눈다. 그중에서 겨우 2차원까지 인지하는  인간이?- 감히 영혼의 존재를 부정한다? 코웃음을 치지 않을 수 없다.

4차원 초입방체

앞서 말한 나를 이루는 두 가지 매체, 그렇다면 육체와 정신은 분리된 존재인가 아님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인가? 기존의 기계론적 사상철학 세계에서는 두 세계는 교호(交好)하지 않는 이원적인 세계이다. 그래서 계량적이지 않는 보이지 않는 세계는 종종 부정된다. 그 둘의 철저한 분리가 자본주의를 낳았고 공산주의를 낳았다. 제도가 아무리 발전한들 그 제도를 지키고 준수해야 할 객체의 의식 수준이 발전하지 않는 한 계급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를 이루는 물질과 비물질, 겉과 속을 모두 아우르는 통찰이 이루어져야 세계 -여기서의 세계는 국가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바이다. 그래서 나란 무엇인가 하는 명제는 항상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고찰해야만 한다. 또한 용어로서 정신, 마음, 영혼은 미세한 의미의 분화가 있기는 하지만 거기까지는 보지 않고 여기서는 다 하나보기로 한다. 어쨌든 나를 가장 나답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한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한 과정으로서 나에 대한 기본 정의가 기본이라는 게 나의 개똥철학이다. 그 둘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현대사상체계에서 더 나아가면 뉴에이지라 하여 현실도피적인 영성운동으로까지 이어지지만 인간은 육체와 현실까지 부정하며 살 수는 없다. 육체를 통하여 우리의 정신을 담는 바른 그릇을 만들어야 하며 또한 나를 둘러싼 물질 환경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세 가지 모든 것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그 중심에는 바른 사유를 할 수 있는 정신이 주가 되어야 한다. 가장 나다운 것은 정신, 영혼이며 그것을 담는 것이 육체이며 그것이 드러난 것이 물질 환경이다. 그리하여 가장 근원적인 나를 굳이 명칭으로 지칭하자면 그저 그러한 나, 존재하는 나, 현존으로서의 나, 현존 자체(I am that I am) 등으로 나열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돌아오면 물질적인 나는 가족들과 친구들, 친지들로 이루어졌고 직장을 가지고 있다. 사실 물질이 넉넉하지는 않으나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많은 공부를 하였으며 물질은 항상 준비하는 자의 몫이요, 물질은 항상 정신에 뒤따라 오는 바, 그리하여 현재 나를 뒷받침해주는 하나의 기둥이 물질이기도 하다. 육체는 비록 체격은 왜소하나 누구보다 건강하다. 육체 또한 마찬가지이다. 정신, 영혼은 육체와 물질을 리드한다. 정신이 주가 되지 않은 건강과 물질은 오래가지 못한다. 사람은 웰빙만을 생각하나 더 중요한 것은 웰다잉이다. 눈을 감는 순간 나를 돌아봄에 무엇을 떠올릴 것인가를 지금 생각하는 견지가 필요하다. 앞서 얘기했지만 현재 나를 받치는 하나의 기둥은 물질이다.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4차 산업과 관련 있다. 그렇다면 현재 나의 내면을 받치는, 물질보다 근원적인 정신과 영혼, 가장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얼마 전 유튜브에서 환생 고승 린포체에 관한 다큐를 보게 되었는데 린포체란 계속된 환생을 통해 제자들과 인류에게 가르침을 주는 인류의 스승 같은 존재이다. 환생을 계속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제자들의 강렬한 염원이라 한다. 다큐의 내용은 제자의 염원에 의해 환생에 대한 단서를 찾고 6년간 죽은 스승의 환생을 찾아 헤매는 제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찾아낸 스승의 환생을 달라이 라마에 의해 인정받고 눈물을 흘리는 제자와 이제는 아이가 되어버렸으나 전생을 기억하는 어린 린포체를 보며 진정한 스승과 제자란 부모와 자식과 같은 관계는 아니나 그보다 더 깊은 영혼의 결맺음임을 더 깊이 각인하게 되었다. 나를 다 나답게 해주는 것은 왕짜 복근도 애플힙도 아니며 비싼 골프채나 벤츠 시리즈도 아니며 장롱 속 깊이 박아둔 땅문서도 주식이나 채권도 아니며 심지어 가족도 아니다. 나에 대한 정의를 열거할 수 있을지언정 이것들이 나를 규정하거나 정의하는 것은 아니다. 물질을 계속 쪼개면 분자, 원자, 전자, 양성자, 중성자, 쿼크… 아마 인간의 상상력이 끝이 없는 한 계속하여 다른 입자들이 출현할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에 더하여 입자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다. 관찰자 효과는 이래서 무섭다. 모든 물질은 각각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 이들은 보는 장비는 현미경이 아닌 고요 속에 있다.

환생한 고승 린포체

나를 나답게 해주는 방편은 명상이다. 그리하여 이름은 말할 수 없으나 현재 온라인 회원수가 가장 많은 명상단체를 통해 나를 관찰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직 부족하여 삶의 희로애락에 많이 휘둘린다. 그럼에도 인간이 가장 근원적으로 나온 곳과 갈 곳이 모두 한자리, 마음이기에 그 관찰을 게을리할 수 없는 것이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 있기에 남을 알 수 있고 현상계에 대한 진단이 가능하며 조금이나마 실상계에 대한 유추가 가능하다. 오감으로 드러나는 곳이 현상계이고, 진정한 마음자리이며 근원계가 실상계인데 물질이 드러난 이 스마트폰, 저 책상, 저 돌, 저 건물들은 현상이며 그 거시적인 현상계에 현미경을 들이밀고 미시적인 양자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 마음 들여다보기인데 그래야만 우리 사는 거시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실로 차원 세계가 높아질수록 실상계에 가까이 가는 것이다. 그 차원을 높이는 모든 수단과 방편이 가장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이며 지금 나에게 가장 큰 방편은 명상이며 그리하여 나는 이 세상을 가장 잘 살게 해주는 큰 목적을 이루게 해 줄 것이다. 여기서 잘 산다는 의미는 세속적인 영역까지도 포함한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고 사유하는 것도 하나의 명상이다. 그 글을 쓸 수 있는 넷상의 플랫폼을 만들어 주신 분들과 나를 포함한 모든 글을 쓰는 분들과 그 글들에 의미를 주시는 독자분들께 감사합니다.



참고로 제가 속한 명상단체는 다음카페 인터넷 빛명상이며 공신력있는 법인단체이며 전현직 대통령들이 인정하셨고 현직 정치인을 비롯하여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각계의 인사들이 인정한 단체이며 미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도 인정받은 국제적인 명상단체입니다. 관련서적은 "나도 기적이 필요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행복순환의 법칙" 읽어보세요


작가의 이전글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