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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전 Nov 14. 2023

염치없이 말랑한 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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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침대에는 귤이 한 박스 쌓여 있습니다. 10kg에 만원밖에 안한다고 해서 잔뜩 사버렸더니 처치곤란이 된 것이죠. 딱히 맛있지도 않습니다. 살짝 밍밍한 귤을 눈에 보일 때마다 우겨넣고 있지만, 어째 줄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귤은 점점 말랑해져 갑니다. 누르면 몰캉 하고 과피가 쑥 들어갑니다. 더 늦으면 상할 수도 있다는 징조입니다. 귤들은 곤란한 제 마음도 모르고 계속 말랑해져 갑니다. 이들을 '염치없이 말랑한 귤'이라 불러도 될까요? 아니면 싸다고 잔뜩 사놓고 괜히 귤을 탓하는 제가 염치없는 걸까요.

 당연히 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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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부터 알람 소리를 듣고도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뇌가 알람소리에 적응해버린 것일까요? 늘 듣던 소음으로 인식해 무시해 버리는지, 아무리 알람이 울려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수업에 지각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대책으로 알람 어플을 새로 깔았습니다. 새로운 알람 소리로 저의 뇌를 공략하기 위해서죠. 이제 아침마다 사이렌이 울립니다. 앰뷸런스가 지나가고 경찰차가 범인을 추격할 때 나는 그 소리입니다. 듣는 순간 마음이 불안해지고 공포심에 휩싸이며 잠이 벌떡 깹니다. 일어나며 핸드폰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저를 깨워준 사이렌에 감사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려면, 때론 불안과 공포를 조성하는 존재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일도 벌어지나 봅니다.

 사이렌에도 익숙해지면, 다음엔 어떤 알람을 사용해야 할까요? 저에겐 엄마가 일어나라고 지르는 소리가 가장 뛰어난 알람이었는데, 이제 그건 들을 수가 없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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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험이란 무엇일까요? 좋은 경험이란 예쁜 사진, 인증하기 좋은 서류를 많이 남기는 것일까요? 오늘 예비군 훈련에 다녀 왔습니다. "깊은 산 깊은 골, 적막한 산야..." 부대에 들어서자마자 낮익은 노래에 오랜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군대에서의 경험,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짭조름하고 비릿한 일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쉰내나고, 몸이 시리고, 뜨겁고, 쑤시는 감각. 군대에서의 경험은 시각적인 연상을 통해 기억나기보다 그런 촉각, 미각, 후각적 느낌으로 기억 속에 되살아났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좋은 경험은 몰라도, 강렬한 경험은 무엇인지 말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각적인 회상, 논리적인 회고와 추론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닌 좀 더 원초적인 감각으로 기억되는 경험이 더 강렬한 경험이라고. 촉각과 미각, 특히 후각으로 기억되는 경험. 군대에서 찍은 사진도, 남긴 서류도 없지만 군대는 잊히지 않습니다. 동물적 감각으로 몸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산에 가서 나뭇잎 냄새를 맡으면 이상하게 참호를 파고 싶어집니다... 킁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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