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는 것
내가 어렸을 때 홍콩에서 사다준 불란서 인형 선물이 급 생각난다.
비현실적으로 길고 빡빡한 속눈썹이 무성한 왕눈이 누우면 감기고 세우면 반짝 뜨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툭 튀어나올 것 같은 눈이 '처키'처럼 섬찟했다.
한국 전쟁 후의 구조 물자와 아울러 홍콩, 마카오 등지에서 흘러들어온 밀수품들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나도 얻어걸리긴 했는데 하필 이름이 '불란서 인형'이었을까?
깜깜이 우물 안 개구리라서 몰랐겠지만
아마 어떤 캐릭터 인형이었을 것이다.
내 아이를 키울 때 아이 키 만한 ' 마징가 Z' 인형처럼.
멀고도 먼 미국이나 유럽이 동경을 넘어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사실 내가 외국에 대해서 눈을 뜬 것은 외삼촌네가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떠났던 일로 인해서였다.
초등 시절에 학교에서 집에 오니 두툼한 책이 있어서 들쳐보니 호화스럽기 짝이 없는 유람선 안내 책자였다. 그땐 잘 몰랐지만 크루즈 회사 홍보물이었다.
매일매일 그 책을 보면서 완전 딴 세상을 상상했다. 나는 비록 일본인이 살다 간 적산 가옥의 다다미 방을 온돌로 개조한, 그래서 연탄으로 난방을 하다가 장판이 누렇게 탄 아랫목에서 엎드려 그 팸플릿을 보고 있을을지언정. 상상은 그 배를 타고 루프탑의 수영장 물속에서 첨벙거리고 있었다.
난생처음 접한 신문물이 호화 크루즈였다. 잘 나가던 직물 사업을 접고 아마도 농업이민으로 아르헨티나를 갔던 외삼촌네는 얼마 안 되어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직물업을 해서 돈을 쇠스랑으로 긁어 1960년대 남산 외인 아파트(지금의 나인원 자리)에 살면서 링컨 컨티넨탈( 아마도 미군들에게서 불하받은)을 타고 다니다가 이민병에 들어서 남미 이민을 가보니 양에 안 찼을 것이다.
영어도 잘하고 사업수완도 좋은 외삼촌에게 그 당시 한국과 비교해서 아르헨티나가 잘 살았다 해도 아닌가 싶으신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셨다.
친가 또한 고모네 가족들도 미국으로 일찌감치 이민을 떠났다.
김포공항에서 이민 가는 가족들을 가운데 놓고 교회 교인들이 빙 둘러서서 통성으로 이민 길을 축복하는 기도를 하고 공항이 떠나가라 하고 찬송가를 부르며 배웅하던 시절이 이었다.
그렇게 희망과 도전 정신을 갖고 떠나서 미국에 도착하면 교회 다니던 사람들은 제일 먼저 한인 교회를 찾는 것이 수순이었는데.
교회를 처음 간 날 정문 앞에서 안내를 보던 사람이 한국에서 부도 내고 도망간 사람을 딱 맞닥뜨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억척스럽고 학구열에 불타는 한국인의 DNA는 남미로 이민 갔다 해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미국이 종착역이었다.
장성한 아들이 있으면 미군으로 입대해서 시민권을 받아서 온 가족의 정식 신분을 취득하는 수순이었다.
남미에서는 처음엔 불법체류로 미국으로, 아프리카의 세네갈, 모로코, 알제리 등지의 불어권에서는 난민으로 프랑스에 자리 잡는 사례가 빈번했고 지금도 여전히 밀려든다.
이민을 왜 갔냐고 혹시 왜 가냐고 물으신다면
'병'에 걸려서이다
한 인생, 한 가족의 삶의 걸려있는 이사도 아닌, 고국을 떠나서 낯설고 물설은 다른 나라에 간다는 것 자체가 이민병에 걸리지 않고는 안 된다.
특히 이북 출신들은 한번 피난을 와 봤기 때문에 전후에 피폐해진 한국보다 기름지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열망으로 바뀌면 삼팔선 넘는 것보다 더 쉽게 이주를 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자녀들을 아이비리그에 보내는 것을 목표로 가게며 공장에서 불철주야 일했다.
이민 오자마자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영어라고는 밥벌이용만 하지만 바디랭귀지로 일해서 자산을 일군 이민자들의 고생담은 눈물 없이 못 듣는다.
그들이 일구어낸 자식 농사도 다 끝나고 은퇴해서는 최근 한국으로의 역이민 바람이 한참 불고 있다.
한국에서 우후죽순 생겨나는 실버타운과 의료의 탁월함과 신속성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귀소본능에 불을 붙였다.
더러는 정착을 하고 더러는 살던 곳이 좋다고 돌아온다고.
내가 이민 올 당시에는 '건너온 다리를 뒤돌아보지 말고 불사르라'는 풍조여서 알뜰히 붓던 주택청약예금도 다 해약하고
아파트도 다 팔아야 미련 없이 미국이나 캐나다에 정착하기가 쉽다였다.
역사는 돌고 돈다더니 내가 20여 년 전에 캐나다에 와 보니 어떤 분은 뚝섬 일대가 다 자기 땅이었다는 등, 또 다른 분은 광화문의 유명한 극장의 소유주였는데 북한에서 간첩 김신조 일당이 내려오는 바람에 전쟁 날까 봐 극장과 그 많은 재산을 팔고 캐나다로 이민 왔다고 했다.
나도 기계 수입상을 하던 남편이 IMF에 환율이 달러당 2000원을 하는 바람에 폭망 해서
별로 많지도 않았던 재산을 팔아서 야금야금 곶감 빼먹듯이.
요즘은 한국의 아파트 가격이 상향되어서 보통 몇십억이며 재산이 있으면 백억 이상의 단위라서 캐나다 외지인들은 상상이 잘 안 된다. 한 친구는 대치동 아파트를 몇억에 팔고 왔는데 몇십억. 다른 친구는 압구정동 아파트 팔아서 주식 사서 쪽박, 매입자는 주식 팔아 그 친구집을 사서 대박. 그래서 돌고 돌아서 '돈'이라는 단어가 확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과거는 잊어야지 살 것만 같은 얼굴들이 주위에 많다.
물론 한국에 있다고 그 재산을 지킨다고는 장담 못 한다. 다른 친구의 언니는 그렇게 사기를 잘 당한다고. 임장을 가서 모델하우스에 손님을 가장한 알바들이 득실거리는 것을 보고 후끈 달아서 집에 가는 길에 은행 들려 돈을 찾아서 되돌아 가
계약을 한 것이 몇 건, 자기도 언니 닮아 귀가 얇아서 사기를 많이 당했을 거라나, 뭐라나.
이민을 오건 안 오건 세상 어디에 살든지 다 하루살이 인생이다.
그래서 오늘 하루, 바로 지금 걱정 근심 다 날려 보내고 재미 있고 즐겁게 살라는 시어머님의 유언을 지키고 있다.
돈과는 무관한 캐나다에서.
캐나다 사회가 큰 발전과 다이나믹한 변화는 없지만 큰 근심도 없다.
그 이유는 캐나다의 사회 복지가 노후의 기본적인 존엄성과 밥 걱정을 책임져 주기 때문이다.
늙어서까지 밥벌이의 지겨움속에서 허우적거린다면 대첵없는 참담함에 서글플 것이다.
개인의 사정에 따라 차이가 나지만 일반적으로 집 한 채(두 채이면 렌트 인컴이 소득으로 잡혀서)있어도 월 소득이 한 푼도 없는 65세 이상 노인연금(각종 수당포함)은 부부 당 최대 월 3000불 받는 한인도 있고 보통 2700불 정도는 대충 받는다. 일인은 1500불~1700불 정도.
우스갯소리로 일반 행정 공무원보다 연금공단 공무원들이 제일 일 잘한다고 칭찬.(개인마다 정산 방법이 다름)
월말 3일 전 비즈니스 데이에 꼬박꼬박 들어오니까.
병원과 치과는 임플란트 외에 거의 무료 진료이니 노인들이 제일 몸과 마음의 여유가 많은 것 같다.
언제 연금이 고갈될지는 모르지만.
자녀들한테 부모한테 매달 3000불이 아니라 300불을 수돗물같이 죽을때까지 꼬박꼬박 줄 수 있냐고 물어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 힘들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