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선택은 없다, 오직 살아갈 뿐!
비바리움(2020) | 로르칸 피네간 감독 | 미모겐 푸츠, 제시 아이젠버그, 몰리 맥켄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탁란
: 기생의 한 종류로, 난생 동물이 다른 개체의 둥지에 알을 낳아 그 둥지의 주인인 해당 개체로 하여금 자신의 새끼를 대신 돌보게 하는 행위의 총칭.
그들은 버려졌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부동산 중개인 마틴은 두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까닭에 그들은 지금, 여기(YONDER), 있다. 욘더는 이상과 영원의 상징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획일성과 완전한 짜임새를 자랑하는 주거구역이다. 이곳은 삶의 필요조건을 충족하고 있으나 안팎의 경계 없이 닫힌 구조를 하고 있어 탈출할 수 없다. 완벽으로 점철된 이곳에 미완으로 존재하는 실체는 젬마와 톰, 두 사람뿐이다.
그들은 선고받았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탈출에 실패한 두 사람은 양육이라는 형을 선고받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유일한 선택지이기도 하다. 까닭에 그들은 아이를 기르기로 결심한다.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바가 이루어질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식사량을 늘리며, 몸집을 키워나간다. 동시에 젬마와 톰을 관찰하고, 흉내말을 내는 등 발달적인 측면에서도 우수한 성장세를 보여준다.
아이는 묘하게 이질적이고, 몹시나 불쾌하다. 그는 100일 남짓한 시간 동안 10살만큼 자라나 성인 남성의 목소리로 관찰대상을 흉내 낸다. 교육되지 않는 어린 짐승 같기도, 남다른 두뇌를 가진 외계 생물 같기도 한 아이는 젬마와 톰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성장한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아이는 의문투성이지만, 두 사람은 아이에 대한 의혹을 풀어내지 못한다.
양육은 두 사람을 반으로 갈라놓는다. 그들은 규격화된 삶의 형태에 질식을 느낀다. 모든 것이 인공적인 이곳에서의 삶은 두 사람의 내면을 거칠고 피폐하게 만든다. 겉보기에 빛깔만 좋을 뿐. 맛과 냄새 어느 것도 느낄 수 없는 음식과 음악도 이웃사촌도 없는 고요는 두 사람을 각자의 심연 속으로 침잠시킨다. 무언을 요구하는 아이의 비명과 헤어날 수 없는 미로에 대한 공포,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만이 이들의 시간을 뒤로 밀어내는 동력이 된다.
아이는 언제나 젬마를 엄마라고 부르지만, 젬마는 끝까지 엄마라는 자신의 역할을 거부한다. 젬마와 톰은 아이에게 키워낼 뿐, 탄생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의 양육은 욘더에서의 탈출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공동체적 관계를 맺을 이유가 없다. 그들은 욘더를 벗어나기 위해 땅을 파고, 아이를 돌본다.
2. No.9.
마틴은 9번 집을 두고 평생 살 집이라고 소개한다. 저당 잡힐 미래의 삶까지 내다보고 설계된 9번 집은 광고 속에 등장하는 모델하우스의 그것과도 닮아있다. 완벽하게 세팅된 견본의 공간 속에서 앞날의 행복을 꿈꾸듯, 젬마와 톰 역시 9번 집의 깨끗하고, 정돈된 첫인상을 높게 평가하며, 안정된 주거를 소망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의 정착은 아니었다. 이것은 정착이 아닌 감금이다. 그들은 신호도 잡히지 않는 이곳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틀린 마을은 해를 따라 걸어도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모든 사물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9번 집의 실내장식처럼 그들 역시 부속의 하나로 존재해야만 한다.
그렇게 그들은 '9번'에서 사육되고 있다. 음식과 물, 그 밖의 생필품이 제공되며, 눈비 없는 맑은 하늘과 계절감 없는 일정한 기온이 설정되어 있다. 두 사람은 무미무취한 음식을 먹고, 역겨운 사내아이를 기르며, 이를 닦고, 잠을 자는 삶을 이어나간다. 삶이라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본디의 삶 역시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 일이므로 다르다 볼 수 없다. 의식주를 벗어나는 삶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당을 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톰이 피다 버린 꽁초가 숨겨진 찰흙을 드러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매일 같이 땅굴을 파기 시작한 것은 필연이었다. 그에겐 무료를 채워줄 어떤 노동이 필요했고, 때마침 제 손으로 할 수 있는 생산적인 무언가가 발견된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땅 속을 파내기 시작한다. 톰에게 있어 흙을 퍼내는 이 일은 지옥에서 자신을 구원해 줄 유일한 행위가 된다.
지옥은 다름 아닌 9번에서의 삶이다. 인내심이 바닥난 톰은 아이를 차 안에 가두어 놓고, 이후에 벌어질 반응을 기다리지만, 마음이 약해진 젬마는 곧 아이를 구해낸다. 이 사건은 두 사람의 간극을 크게 벌어지게 만들고, 톰과 마주치는 것이 불편해진 젬마는 아이를 데리고 야외로 나간다. 잔디밭에 아이와 나란히 누운 그녀는 똑같이 생긴 구름을 지겹다고 표현하지만, 아이는 아름답다고 이야기한다. 아이는 아름다운 하늘 밑에서 멋진 집에 사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젬마는 대기(大氣)의 환경마저 인위적인 이곳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아이가 미스터리하다.
다음 날, 아이는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난다. 아이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고, 책에는 알 수 없는 외계어와 TV속 무늬에 대한 설명, 남녀에 관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이는 책과 TV를 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학습한다. 젬마는 흉내내기 놀이를 이용해 아이가 만난 인물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쓰고, 젬마의 꼬임에 넘어간 아이는 '그 사람'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그 사람'은 목울대를 부풀리며, (새가 내는 것 같은) 기괴한 소리를 내는 존재다.
3. CIRCLE(인간의 사물화)
성인이 된 아이는 노쇠해진 두 사람을 위협하는 인물이 된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모두 자란 아이는 두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를 야기한다. 젬마는 아이의 비위를 맞춰가며 식사를 차리고, 톰과 제 몫의 식사는 아이가 없는 안방에서 해결한다. 젬마는 외출하는 아이의 뒤를 밟지만, 아이는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나타난다. 젬마는 자신이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캐내려 애쓰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아이는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다.
톰은 여전히 굴을 파고 있다. 그는 의미를 담아 시작한 일이 아집으로 바뀌어 돌아갈 수도, 그만둘 수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톰은 자신이 만든 굴 속에 빠져 아래로 아래로 추락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흙 속에 묻힌 어떤 것을 발견한다. 힘을 주어 꺼내어 낸 그것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놀란 톰은 넋을 잃고 지상으로 올라온다.
고된 노동으로 인해 쇠약해진 톰을 부축해 집으로 돌아간 젬마는 현관문이 잠기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는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지만 문을 열어달라는 젬마의 외침에 대꾸하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는 두 사람과 함께 살던 집을 빼앗고, 완전한 독립체로써 사회적 존재가 될 채비를 마친다. 아이는 더 이상 부모의 도움이 필요 없다.
병든 톰과 함께 차에서 먹고 자는 젬마, 두 사람은 이곳에 오기 전에 맞은 바람을 떠올리고, 첫 만남을 상기한다.
"당신 때문에 난 지금 집에 있어."
톰은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한다. 잠시 후, 아이가 박스 하나를 들고 나타나 죽은 톰을 진공백 속에 넣는다. 그는 애도의 말이나 슬픈 기색 없이 철 지난겨울 외투를 정리하듯, 죽은 톰을 일시에 처리해버린다.
슬픔을 가누지 못한 엠마는 곡괭이를 들고, 아이를 공격한다. 아이는 곡괭이를 피해 보도블록 사이로 필사의 도망을 하고, 젬마 역시 끝을 볼 기세다. 아이를 따라 미끄러져 내려간 그곳엔 아이와 똑 닮은 어떤 아이가 있고, 그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또 다른 젬마가 있다. 반복에 지쳐 삶을 포기한 이름 모를 톰과 부부의 시간을 학습하는 또 다른 아이가 있다.
각기 다른 인간들이지만, 삶의 형태는 동일하다. 영화는 시각적 반복을 통해 현대인의 박탈당한 개성과 단조로운 매일을 조명한다. 이들의 피로와 공허, 불안, 고립에의 압박은 시스템 속을 살아가는 인간의 심정을 고스란히 재현해 보여준다. 그들에게 있어 삶은 고통이요, 그 자체로 형벌이다.
난 대체 뭐야? 이건 뭐고? 이 안에 난 뭐지?
넌 엄마야. 아들을 세상에 내보낼 준비를 해 주는 사람
그다음에 엄마는 뭘 하는데?
죽지
그렇다. 다음은 없다. 아이는 진공백 속에 포장한 젬마를 마당으로 끌고 와 (톰이 파 놓은) 구덩이 속에 던져 넣고 흙을 덮는다. 그러자 금세 새로운 잔디가 자라난다. 그들의 죽음은 너무나 간단하고, 이제는 아예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누구도 그들이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들의 존재를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는 자동차이지만, 사물인 자동차는 말하지 못한다.
주유를 마친 아이는 젬마의 차를 타고 욘더를 빠져나간다. 그는 처음 젬마와 톰이 찾았던 부동산으로 향한다. 그리고 임종이 가까운 중개업자를 간단히 처리한 뒤, 마틴이라 적힌 그의 명찰을 달고 그의 자리에 앉는다. 아이는 이제 마틴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현대사회 속 인간은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그 누구도 맡은 바를 내던진 상태로 자아를 획득할 수 없다.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종속성을 가지며, 이에 충실한 대가로 약간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예외 없는 공식은 누구도 비켜 갈 수 없고, 삶에 있어 지속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간은 유한하고, 사회는 계속된다. 개인의 죽음은 새로운 인물로의 대체로 연결되고, 갈수록 심화되는 경쟁과 인간성 상실은 저변에 축적되어 또 다른 마틴을 탄생시킨다. 사물의 위치로 낙하한 인간은 일원화된 세계를 구성하며, 한 마리의 실험체로 살아간다. 이렇게 탄생한 극단적 형태의 세계에 욘더라는 이름을 붙여도 어색함이 없는 것은 마틴이 보여준 초현실적인 모습 때문 아닐까. 어쩌면 우리도 욘더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