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마 나기사 감독 | 마츠다 에이코, 후지 타츠야
감각의 제국(1976) | 오시마 나기사 감독 | 마츠다 에이코, 후지 타츠야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 군국주의와 탐미
1929년 미국의 대공황은 일본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농산물 가격폭락과 공산업의 잇따른 부도로 사회 불안과 경제 침체가 심화되고 있었다. 이에 대중들의 불만과 원성이 높아지자 일본 정부는 침략주의 정책을 펼치게 된다. 그 결과 1930년대 일본의 주요 정치 결정은 군부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 교육, 경제 등 국가를 이루는 주요 요소들을 군대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동양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이미 타국의 침략과 식민지 경영 등으로 전시체제를 확립한 상태였다. 이들은 일본 제국이라는 명칭으로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주변국과의 다툼을 비롯 태평양 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서양 열강들과의 전쟁도 불사하였다. 또한 전선(戰線)의 확대로 인해 인적 자원이 부족해지자 민간인들을 무장시키고, 극단적인 희생을 드높였으며, 군대를 신성화하여 병영 사회를 유지했다. 그리고 1945년 포츠담 회담에서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그 명맥을 계속 유지해 왔다.
전쟁광의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대면과 외면으로 나뉜다. 대면의 쪽에 선 인간은 또 다른 유혈사태를 일으키며, 극에 맞서기 위해 정반대의 극단을 강구하고, 외면의 길로 들어선 쪽은 현실에서 발을 떼고, 미(美)를 최고선으로 여기는 도피성 향략을 추구한다. 이들은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고, 쾌락을 위한 쾌락을 탐한다.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 선 개인은 너무도 무력하고, 목숨마저 가볍다. 시시각각 찾아오는 죽음의 공포와 가정의 해체, 강제징병, 징용 등은 집단 허무주의를 불러일으킨다. 오랜 전쟁에 지친 이들은 더 이상 종전을 향한 희망이나 일상으로의 회복을 기대하지 않는다. 대신 원초적 자극과 극단적 쾌락을 갈구한다. 더 강렬하고, 새로운 감각을 쫓는다.
탐닉은 갈망(의존)->내성->부정적 결과 3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그리고 완성이란 대체로 죽음이다. 죽어야 끝나는 메커니즘은 전쟁을 사랑하는 이들의 작동원리와 다를 바 없고, 권력에의 탐욕은 본능으로의 귀속과 같은 결을 가진다. 하지만 극지에 머무는 이들의 균형감각은 일반의 범주와는 다른 영역이므로, 시대의 특수성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1930년대를 배경으로 둔 영화 속 주인공 역시 모순적, 혹은 파괴적인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로써 성(性)을 택한다. 두 사람은 각자의 가정으로부터 도망치고, 단조로운 일상으로부터 탈주한다. 이발소를 나온 키치조의 옆으로 제국의 군사들이 발맞춰 걸어갈 때, 그는 시대의 흐름과 무력한 자신을 마주한다. 키치조가 느끼는 패배감은 허공을 떠도느라 지상을 외면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다. 그는 반대편에 서서 욱일기를 흔드는 아낙들과 달리 그들을 응원하지도, 맞대하지도 못한다. 그저 바닥만 보고 걸어갈 뿐이다.
#2. 집착과 소유
남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요정(料亭)에 취직한 사다는 주인인 키치조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아내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며 서로를 향한 마음을 키워나간다. 그러나 가정이 있는 키티조가 안방으로 건너가는 것까지 막을 수 없는 사다는 키치조와 아내의 동침 장면을 목격한 이후, 실의에 빠진다. 요정을 그만둔 사다는 키치조와 함께 도피 행각을 벌이고, 작은 여관을 거주지 삼아 그들만의 작은 결혼식을 올린다.
키치조를 향한 사다의 성욕은 집착을 넘어선다. 그녀는 잠든 키치조의 성기를 잡고 누워 식사와 수면을 거부하며, 오로지 키치조와의 섹스로 하루를 꼬박 채운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그들의 사랑은 서로를 품어내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하지만 도피자금이 떨어지자 사다는 매춘에 나선다. 그와 헤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 탐탁지 않은 그녀는 키치조의 겉옷을 보따리에 넣고, 길을 떠난다. 키치조 역시 사다의 옷을 입고 앉아 그녀를 기다린다. 돈 때문에 다른 남자의 품에 사다를 보낸 그는 여간 마음이 심란하지 않고, 술시중을 들며 도망을 권하는 여관주인을 강간하는 것으로 자괴를 떨쳐버린다.
매춘상대인 교장과 만난 사다. 그와 한 이불을 덮고 누운 사다는 갑자기 자신을 때려달라고 소리친다. 교장은 사다의 뺨을 때리고, 꼬집고, 머리채를 잡아당긴다. 발기 불능한 교장과 밤을 보내야 하는 사다는 성적인 흥분 대신 가학 행위를 당하는 것으로 고통이라는 새로운 자극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성행위 없이 대가를 받는 것에 대한 가책을 덜기 위한 방책으로 앞의 방법을 택한다
많은 돈을 손에 쥐고 여관으로 돌아온 사다는 그를 향한 그리움을 한껏 표한다. 키치조는 교장과의 하룻밤에 대해 묻고, 사다는 자신이 당한 가학행위에 대해 털어놓는다. 그러자 그는 교장이 했던 것처럼 자신을 때려달라고 말한다. 사다는 점점 세기를 올려 그의 뺨과 몸을 때린다. 성도착증의 발현은 경제력을 가지지 못한 쪽이 가진 쪽으로부터 학대를 당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 성별은 별개의 것으로 분류되며, 자본만이 힘을 가진다.
강력한 군사력 역시 막대한 자본에서 나온다. 지배하고, 지배받는 권력 싸움은 스스로를 제국이라 일컫던 당시 일본의 실재와 다르지 않다. 전쟁을 향한 그들의 광적인 지배욕은 사다와 키치조와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다. 성적인 흥분을 위해 혹은 그 감각을 얻기 위해 강박적으로 변해가는 사다와 체념하고 무력해져 가는 키치조의 모습은 정복에 눈이 먼 일본의 시대정신으로 치환할 수 있다.
키치조 역시 아내의 호출을 받는다. 사다는 키치조의 성기를 잘라버리겠다 협박하며, 아내와의 정사를 경계한다. 본가로 돌아간 키치조는 잠을 청하지만, 누군가 마당의 장독을 깨뜨리는 일이 발생한다. 아내는 단박에 사다를 의심하지만, 그는 애써 모른 척한다. 다음 날, 면도를 하고 있는 키치조의 등 뒤로 아내가 다가오고, 약속과 달리 그는 아내를 밀어내지 못한다. 이때, 문 밖에 누군가의 동태가 서리고, 예민해진 그는 창문을 깨뜨려 신원을 확인한다. 범인은 그의 요정에서 일하는 여직원이다.
식칼을 들고 키치조를 맞이하는 사다. 그녀는 아내를 위해 자신을 홀로 둔 그에게 서운함을 표한다. 이제 그들의 섹스는 고통이 더해진 모양새를 갖춘다. 더 강한 자극을 위해 서로의 목을 조르고, 괴로움을 느끼고, 숨이 넘어가는 극한을 맛본 후에야 서로에게서 풀려난다. 사랑으로 시작된 그들의 결합은 이제 소유욕만 남아 죽음이라는 하나뿐인 결말로 한 발 한 발 다가선다.
무게를 더해가는 사다의 욕정에 지친 키치조는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지 못한다. 그녀는 잠에 빠지려는 그의 목을 졸라 숨을 빌미로 욕구를 채운다. 그는 이왕 조를 거면 도중에 멈추지 말라는 포기 섞인 말을 남기고, 사다 역시 목덜미를 쥔 손에 힘을 풀지 않는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기진해진 컨디션, 중지 없는 그녀의 아귀는 결국 키치조의 사망으로 끝을 맺는다.
#3.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
영화에 내포된 즐거움 중 하나는 관음증이다. 눈길을 받는 것 또는 눈길을 주는 것 모두 쾌락의 원천으로 작용할 수 있다. 따라서 관음증은 대상화된 타자를 통제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며 성적 만족을 느끼는 모든 행태의 것을 포함한다. 본능은 자아의 구성에 의해 수정되지만, 관음 하는 즐거움은 성적인 기반으로 계속 존재하기 때문에 시선의 방식은 영화 구조안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갖는다.
영화는 스크린이라는 밀폐된 세계 안에서 번져 나오는 빛과 그림자로 관객들에게 분리감을 조장하고 이를 통해 환상을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설계된다. 관객들은 상영과 동시에 사적인 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환상의 세계에 인위적으로 노출되어 자신의 억압된 욕망을 연기자에게 투사시킨다.
따라서 매혹적인 내러티브를 따라가는 관객은 일시적으로 자아를 상실하게 되며, 화면상의 대상과 자신을 일치시켜 판타지가 만들어내는 상징적 질서 안에 머물게 된다. 그는 한 인물이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과정을 수동적인 태도로 밟아나가게 되는데, 이때 능동=남성, 수동=여성이라는 성적 불균형이 현상을 이루는 내러티브의 공식을 학습하게 된다.
내러티브 속 여성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신이거나 창녀이거나. 그녀들은 모성을 지닌 성스러운 성모 마리아의 모습 또는 사창가를 배회하며 남성의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후자의 경우 노출을 감행하여 시선을 사로잡고, 에로틱한 영향을 남성에게 어필하는 것으로 전시된다. 여성은 남성의 욕망에 자신을 맞추고, 부응하는 대상으로 상징화된다.
반대로 남성은 권력을 표상한다. 그들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이며, 남성은 완전하고 이상적인 자아의 형태로 또는 능동적인 통제자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동시에 그들의 즐거움을 위해 전시되는 여성이라는 대상을 가학의 원료로 소비한다.
그러나 사다와 키치조의 관계에선 기존의 공식이 완전히 역전된다. 사다는 자신의 성욕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키치조에게 섹스를 요구하는 주체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그녀의 성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는 연인이자 사랑의 대상이며, 사다 역시 키치조의 시선 속에 사로 잡혀 있지 않다. 노출에 있어서도 그녀는 키치조와 대등을 차지한다.
묶여있는 여성과 학대하는 남성이라는 기존의 클리셰와 달리 가학과 피학의 관계에서도 사다는 전자의 자리에 있다. 그녀는 키치조의 뺨을 때리고, 목을 조르는 것도 모자라 그의 수면과 식사를 앗아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는 줄곧 사다의 시선으로 그녀를 따라가며, 그녀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고, 그녀의 욕망을 욕망하며, 그것이 전면에 드러나도록 상위에 그녀를 배치시킨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인물도 여성이다. 다소 놀라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거세 공포를 시각화한 것이 아닌가 싶은 정도로 남성 중심의 시선에 충격요법을 선사한다. 그녀는 키치조의 남근을 잘라 손에 쥐고, 그와의 영원을 소망한다. 비록 그는 죽었지만, 그의 마지막시선은 사다이며, 그녀가 소유하고자 했던 그의 육체와 사랑과 죽음 모두를 그녀의 것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