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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우 Feb 20. 2021

우리가 서있는 그곳이 바로 무대, <썰빵>

퇴물 개그맨들이 개척한 새로운 코미디의 길



한 물간 개그맨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TV에서 활약하던 이들은 더러는 유튜브로, 더러는 공연장으로 그리고 누군가는 팟캐스트라는 또다른 무대에서 저마다의 코미디를 이어나가고 있다. 많은 코미디언들이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유튜브는 코미디의 새로운 무대로 대중에게 인식되고 있지만, 팟캐스트는 한국에서 유독 정치/시사 영역의 콘텐츠들이 플랫폼의 대세가 되면서 예능 분야는 상대적으로 입지가 약한 모습을 보여왔다. 송은이&김숙의 <비밀보장>의 대성공은 이러한 경직된 팟캐스트 시장에 새 바람을 불러왔고, TV 코미디의 몰락과 더불어 많은 개그맨들이 지금까지도 팟캐스트 진출을 시도하고 있다.



많은 개그맨들이 팟캐스트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팟캐스트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둔 개그맨들과 방송은 많지 않다. 전문적인 기획과 구성이 부재한 채, '맨 땅에 헤딩'식으로 무작정 만들어낸 방송 (심지어는 방송되기에 부적합할 정도의 녹음상태를 보여주는 정도까지) 들은 청취자들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꽁트 위주의 코미디를 해왔던 이들의 토크가 그 모든 아쉬움을 덮을만큼 뛰어나지도 않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팟캐스트의 자유로움을 보고 뛰어든 개그맨들은 오히려 그 자유로움으로 인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많은 개그맨들이 팟캐스트 시장에서 소리소문없이 뜨고 졌다.



박성호(좌),황현희(중), 김대범(우), 정영진(밑)


그런데, ‘코미디언들의 무덤’과도 같았던 팟캐스트 시장에서 햇수로 4년을 꿋꿋이 이어나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 이름하여 <썰빵>. 황현희라는 팟캐스트에선 나름의 거물급 코미디언을 필두로, ‘대빡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김대범, 웃찾사 <LTE 뉴스> 등에서 활약한 김일희라는 세 명의 개그맨이 시작한 팟캐스트다. 이들은 이후 김일희가 계속된 악플에 못이겨 하차하고, 개그맨 박성호가 들어오면서 본격적인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썰빵>은 매니아층을 양산하며 순위권에 오르는 듯, 코미디 팟캐스트로는 이례적인 인기를 얻으며 현재 시점 약 15000명의 구독자를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대중적인 인지도를 확보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수치지만, 다른 코미디 팟캐스트의 처참한 성적을 본다면 이는 분명 의미있는 성과다.


 <썰빵> 공개방송


<썰빵>은 예능 카테고리의 다른 팟캐스트들과 비교해서 ‘날 것 그대로의 방송’이라는 독보적인 강점이 돋보인다. 솔직함과 과감함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토크와 걷잡을 수 없는 진행은, 전통적인 라디오의 문법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시사와 사연에 의존하는 기존 팟캐스트 예능에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뜬금없이 노래를 부르거나, 버럭 소리를 지르는가 하면, 주제와 전혀 다른 방향의 토크로 흘러가 그날의 방송을 망쳤다고 자책하는 이들의 맥락없는 방송에서 엿보이는 인간적인 모습은 매니아층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자유롭고 솔직하다는 인터넷 방송의 최대 강점을 어쩐지 활용하지 않았던 팟캐스트 시장에, 이를 가장 적극적이고 영리하게 경쟁력으로 활용한 <썰빵>이 자리잡을 수 있었다. <썰빵>이 '날 것의 방송'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게 만드는 김대범의 시원시원한 토크를 필두로, 특유의 연기력과 발성으로 <썰빵>에 꽁트요소를 집어넣는 박성호, 고삐풀린 이 두 개그맨을 적절히 다듬는 황현희까지 세 개그맨의 조화를 또한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개그맨들의 역사를 파헤치는 '개그왕조실록'


하지만 <썰빵>이 그저 거친 토크와 맥락없는 상황극에만 그쳐있었다면,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꾸준히 이어나갈 기반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방향을 잃은 듯한 이들의 방송에는 '코미디'라는 한가지 확실한 주제와 방향성이 있었다. 특히 '개그왕조실록'이라는 코너와 개그맨들과 함께하는 '게스트 초대석'이 그렇다. 공채 개그맨들의 역사를 돌아보며 개그맨들과의 일화를 풀어내는 '개그왕조실록'과 선후배 개그맨들을 초대해 개그 코너의 비화 등을 이야기하는 '게스트 초대석'은 모두 코미디를 둘러싼 토크쇼였다. 코미디가 지금껏 하나의 장르로, 방법으로 존재해왔던 것에 비해 <썰빵>에서는 코미디를 하나의 주제와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신선하고 흥미로운 작업이었다. 방송 초기에 시도했던 '시사'를 과감하게 벗어던지고, 본인들의 주종목이었던 코미디를 전면에 내세운 <썰빵>의 전략은 유효했고 이것이 방송을 오랫동안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그런 <썰빵>도 장기화의 탓으로 주춤한 모습이 점점 보이고 있다. 풍성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오디오 콘텐츠의 특성상, 오랜 방송으로 이야깃거리가 소진되어버린 지금이 어쩌면 <썰빵>의 최대 위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유튜브화를 시도하고 있으나, 오디오 플랫폼에 최적화되었던 <썰빵>이었던지라 영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매니아 위주의 방송이라는 점 때문에, 오랜 기간 광고수익이 따르지 않는 현실적인 어려움까지 안고있는 <썰빵>의 다음은 무엇이 될까.


<썰빵> 파이팅!


<썰빵은> 무대가 사라진 코미디언들이 간절히 찾아나선 또 하나의 소중한 무대다. 한 때 공개 코미디 무대에서 활약하며 코미디의 최전성기를 빛낸 세 사람이, 위기에 처한 코미디의 현실 속에서 어렵게 닦은 길이다. 갑작스레 길을 잃은 후배 코미디언들은  <썰빵>의 성공에서 또다른 코미디의 가능성을 보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퇴물'이라고 혀를 차던 개그맨들은 어느샌가 이렇게 웃음을 주기 위한 통로를 모색해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전하고 있었다. 팟캐스트라는 코미디의 험지에서, 보란듯이 코미디의 가치를 간직하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썰빵>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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