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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니 Oct 02. 2022

왕가위의 멀티버스

홍콩의 시간을 바탕으로 왕가위의 미장센과 스토리텔링을 재해석한 <왕가위의 시간>(스티븐 테오 지음)이 출간됐다. 그의 영화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낭만주의자에게 추천한다.


<중경삼림>(1994)


만우절에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중경삼림>(1994) 속 경찰 223(금성무)은 그녀가 돌아오길 바라며 한 달 동안 유통기한이 5월 1일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매일 구매한다. 그리고 유통기한이 없는 기억의 통조림을 바란다. 한편, <화양연화>(2000)에서 차우(양조위)는 수리첸(장만위)과의 관계에서 파생한 금지된 사랑의 파편을 앙코르와트 기둥 구멍에 묻는다. 마치 찰나를 영원히 박제라도 하려는 듯. 이러한 행위는 흥미롭게도 <2046>(2004)에서 물리적 시간과 영화적 시간을 잇는 연결 고리로 작용하는데, 이를 방증하는 요소는 차우가 머문 호텔 2047호에서 2046호를 엿볼 수 있는 작은 구멍이다.


왕가위 감독과 장국영


그런데 2046호가 어디던가? 바로 <화양연화>에서 차우가 수리첸과 기려한 나날을 보낸 공간이다. 이처럼 왕가위의 필모그래피는 대혼돈의 멀티버스 원조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콩의 시공간이 촘촘히 엮여 있는 까닭이다. 그의 영화는 홍콩 주권이 중국에 이양된 1997년을 기점으로 성격이 묘하게 달라진다. 여전히 감독 마음 안에서 일렁이는 1960년대 유년 시절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1997년 이전에 제작한 영화는 문화적·정치적 불안을 겪은 홍콩의 시대정신을, 이후 영화는 불확실한 홍콩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아비정전>(1990)은 반사회적인 ‘아비(건달, 날라리)’를 전면에 내세우며, <화양연화>와 <2046>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상황을 사랑이란 감정에 투영한다. 그러나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바라보는 위 영화와 달리 <중경삼림>은 현재(1990년대 배경)를 통해 과거를 소환한다. 금발 가발을 쓴 여인(임청하)은 1960~1970년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을 떠올리게 하고, 파인애플·샐러드는 연인과의 추억을 반추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중경삼림>(1994) & <화양연화>(2000)


평론가들은 <아비정전>과 <화양연화>, <2046>을 1960년대 홍콩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연작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서두에서 <아비정전> 대신 <중경삼림>을 언급한 건 ‘시간’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20여 년 전 영화가 여전히 오늘날 세대와 공명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왕가위가 직조한 시간이 유통기한 없는 통조림처럼 다가올뿐더러, 또 하나의 유니버스가 추가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 비록 여기서는 몇 편의 영화만 언급했지만, 더 넓은 감독의 세상이 궁금하다면 <왕가위의 시간>을 읽어보길 바란다. 왕가위의 작품 세계 30주년을 기념해 출간한 <왕가위의 시간>은 모인그룹 정태진 대표와 열아홉 함초롬 대표, 감수를 맡은 경희대학교 국문과 김중섭 교수가 합심해 이룬 결과물이다. 책은 왕가위 영화를 문학적·시각적·지역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연구서이자 왕가위와 정태진 대표의 30년 우정에 바치는 헌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왕가위의 시간>은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현장 스틸 사진을 수록해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얽히고설킨 감독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경험을 할 수 있다. [2022.09]


왕가위의 작품 세계 30주년을 담아낸 단편영화 <One-Tenth of a Millimeter Apart>(2021)

                                                                                          이미지 제공 모인그룹, 도서출판 열아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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