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뢰르 펠르랭
2012년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의 중소기업·혁신·디지털 경제 특임장관으로 입각, 최초의 아시아계 프랑스 장관으로 화제가 된 플뢰르 펠르랭(Fleur Pellerin). 탄탄대로가 예정된 공직 생활을 뒤로하고, 현재 그는 한국·유럽 스타트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돕는 ‘코렐리아캐피탈’ 대표로 활동 중이다. 얼마 전 첫 에세이와 함께 한국을 찾은 플뢰르 펠르랭에게 삶의 이모저모를 물었다.
프랑스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부쉐론과의 화보 촬영은 어땠나요? 공식 석상에서 받는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와는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아요.
패션 화보처럼 자연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싶었는데, 모델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습니다.(웃음) 프랑수아 올랑드 정부에서 문화부 장관을 지낼 때 홍보를 위해 프랑스 브랜드를 자주 입었어요. 메종에 관해서도 공부를 많이 했고요. 문화부 장관은 문화 예술을 총괄하는 자리인지라 패션 또한 세심하게 살펴봐야 했거든요. 그때 프랑스 브랜드와 더 깊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중에서도 부쉐론은 클래식하면서 대담한 스타일을 선도하는 주얼리 브랜드잖아요.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라는 제 삶의 궤적과 비슷한 부쉐론 덕분에 촬영하는 동안 덜 어색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부쉐론 ‘퀘스천마크 네크리스’는 자유로운 여성성을 상징합니다.
잠금장치가 없어 혼자서도 착용할 수 있다는 것이 ‘퀘스천마크 네크리스’의 특징이죠. 우아한 디자인에 실용성을 가미한 디자인에는 여성이 자유롭길 바라는 진보적 여성관이 담겨 있고요. 이는 동양인·여성·안정적 공직이라는 경계에 갇히지 않고 도전하려 했던, 어쩌면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제 선택과 비슷하지 않나 싶습니다.
프랑스 각료로 활동할 때 “일부러 딱딱한 옷차림을 해야만 더 능력 있고 진지해 보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기업인이 된 지금은 어떤가요?
별로 바뀐 점은 없어요. 하나만 꼽자면, 공직에 있을 때보다 청바지를 자주 입는다는 것? 캐주얼 룩 빈도가 늘었지만, 여전히 세련되고 우아한 스타일도 좋아합니다. 옷을 선택할 때는 TPO에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게 패션이란 ‘내가 당신을 존중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거든요. 때로는 패션을 통해 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끌리는 스타일이 있나요?
어릴 때 1950년대 스타일에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로렌 바콜, 오드리 헵번 등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배우들의 우아함을 따라 하려고 노력했어요. 동시대 인물로는 샤를로트 갱스부르가 있겠네요. 하지만 그들의 스타일이 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저만의 스타일을 찾기로 했죠.(웃음) 질문에 대한 답을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면, 최근 디올 ‘뉴룩’을 재해석한 마리아 그라치아 치우리의 디자인에 눈길이 갑니다.
위의 질문들은 에세이 <이기거나 혹은 즐기거나>를 읽다가 떠오른 것입니다. 책이 세상에 나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모든 기억이 생생하게 적혀 있어 놀랐어요.
언젠가 한국 친구들이 그러더군요. “여성을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존재로 바라보는 한국 사회에는 프랑스에서 성공한 네 이야기가 필요해”라고. 처음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프랑스에서 사회적 사다리를 오를 수 있었던 건 모두가 같은 인간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근간을 둔 교육 덕분이에요. 인종·문화·젠더·종교와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똑같은 기회를 제공하려 노력하는 프랑스 교육을 한국 상황에 적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더군요. 그런데도 친구들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 ‘유리 천장’을 넘은 일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으니까”라며 설득하더군요. 수년을 고민하다 펜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 2013년 프랑스 정부 일원으로 한국에 돌아왔을 때 기자들이 한 질문이 있습니다. “당신은 한국인이라고 느낍니까, 프랑스인이라고 느낍니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어요. 생후 6개월인 저를 프랑스로 보낸 나라에 어떤 감정을 가져야 할까요? 제게 DNA·혈연보다 의미 있는 것은 프랑스 시민이라는 사실인데 말이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제 마음을 자세히 설명해야 할 것 같더군요. 한국 친구들과 교류를 시작한 것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어요.
에세이라고 해서 가벼울 줄 알았는데, 곳곳에서 사회학적 개념이 드러나 눈에 띄었습니다. 프랑스든 한국이든, 사회적 지위에서 오는 차별은 쉬이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 같아요.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예요. 현실에서 평등한 기회를 얻는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외국어에 능통하고, 폭넓은 문화적 경험을 쌓은 사람이 유리할 수밖에 없어요. 더구나 소위 상류층이라 불리는 가정에서 체득한 언어 습관과 행동은 계층을 구분하는 기준이 됩니다. 지식은 학교에서 배울 수 있으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급을 나누는 미세한 생활 습관은 가정에서 이뤄진다는 뜻이죠. 이는 고등교육기관에 들어갈 때도, 취업할 때도 큰 이점이 됩니다. 내가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기회를 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건 불행 아닐까요.
그런데도 끝없는 지지와 응원이 사회적 장애물을 뛰어넘는 힘이 될 수 있을까요?
부모님의 신뢰가 큰 힘이 됐습니다. 항상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아이’라고 응원해주셨거든요. 부모님은 피에르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를 접하지 않았어도 문화적 소양이 긴요하다는 걸 아셨던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동네 도서관에서 여러 장르의 책을 읽게 했고, 수줍음을 극복하라고 연극 수업도 등록해주셨어요. 참! 성적으로 압박을 받은 적도 없네요.(웃음)
그렇다면 2014년 문화부 장관 임명 후 어떤 정책을 펼쳤나요?
대통령 임기 중반에 임명돼 시간이 부족했어요. 문화계는 보수적이고 변화에 소극적이라 시간이 필요해요. 게다가 당시 대통령은 경제 정책에 집중하는 바람에 난관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는 ‘문화 민주화’를 우선순위로 삼았어요. 박물관, 오페라 등 상류층의 특권이라 여겨지는 문화생활이 벽처럼 다가오지 않기를 바랐죠. 연극·음악 분야에서 아마추어 예술 활동을 장려했고,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책과의 거리감을 줄일 수 있도록 마트 주차장·캠핑장·해변 등에서 북 페스티벌을 개최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제게 그랬던 것처럼요.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 캠프에서 다양성 분야 업무를 제안받았을 때 디지털 분야를 맡고 싶다고 역제안한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젊은 동양인 여자’라는 잣대가 구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양성 문제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경제와 정치를 공부한 경력보다 외모가 앞서는 상황에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디지털 분야를 맡고 싶다고 제안했습니다. 때마침 대다수 업무가 디지털로 전환되는 시기라 디지털이 미래 핵심 분야가 될 거라고 판단했거든요.
이러한 관심이 ‘라 프렌치 테크(La French Tech)’로 이어졌겠죠? 중소기업·혁신·디지털경제 특임장관 시절 프랑스 정부의 스타트업 육성 정책을 주도하셨는데요. ‘붉은 수탉’ 아이콘을 통해 각 지역의 기술뿐 아니라 문화·역사 콘텐츠를 연결한 것이 흥미롭더군요.
뛰어난 기술과 아이디어로 무장했음에도 프랑스 스타트업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어요. 정부 지원이 열악해 다수가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이를 타개하려 세금 제도 개선, 국가 지원 정책 확대, 비프랑스인 인재 유치 등을 기획했어요. 동시에 실리콘밸리나 이스라엘처럼 스타트업이 교류하고 협력할 수 있는 플랫폼의 필요성도 인식했습니다. 이전에는 지역 특성에 맞춰 신사업 육성을 지원했는데, 국가적으로 일관된 방향성을 부여하기가 어려웠거든요. 산재한 스타트업을 하나로 묶기 위해 ‘붉은 수탉’ 종이접기로 브랜딩을 했어요. 지역의 문화·역사적 의미에 따라 모양은 달라지지만(리옹은 사자, 낭트는 코끼리 등), 붉은색 종이접기를 통해 ‘라 프렌치 테크’의 정체성과 네트워킹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지역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준 덕분이에요.
코렐리아캐피탈과 협력 관계인 네이버의 ‘글로벌 AI 연구 벨트’도 비슷한 맥락인 것 같습니다. 한국·프랑스·일본·베트남 등을 잇는 국경을 초월한 기술 교류가 미국과 중국에 견줄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 건 아마 라 프렌치 테크 사례가 있어서일 거예요.
장관 재직 시 미국과 중국의 빅테크가 전 세계 디지털 경제를 지배할 위험이 있음을 확신했어요. 미국과 중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패권 구도에 균열을 내고 싶었습니다.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스타트업이 아시아 국가와 시너지를 일으킨다면 경쟁력이 있을 것 같았어요. 네이버와 펀드를 결성해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고자 하는 유럽 스타트업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구글에 대항하는 자국 검색 엔진을 만든 네이버의 기술력과 유럽 진출에 관한 그들의 관심이 저와의 접점이었어요. 현재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섹터의 스타트업들을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한국 스타트업이 프랑스에서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프랑스와 한국을 잇고자 하는 대표님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다른 기업과 차별화된 지점을 찾으려 해요. 대표적 예로 프랑스 하이엔드 스피커 ‘드비알레’가 있습니다. 음의 왜곡 없이 순수한 소리를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한 브랜드죠. 코렐리아캐피탈이 투자를 결정했을 때 드비알레의 아시아 시장 수익은 5% 수준이었는데요. 투자 초기부터 첨단 기술에 초점을 맞춘 결과, 현재 드비알레는 수익 50% 이상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시장에서 얻고 있습니다.
이제야 많은 사람이 궁금해할 부분을 질문하게 되네요. 15년의 정치 생활을 접고 스타트업 투자자로 변신한 이유는?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 있는 완전히 다른 분야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조직원이 아닌, 대표가 되었기에 모든 책임이 제게 돌아오는 건 부담이 되더군요. 실패라는 단어가 주는 스트레스도 있고요. 때로는 외로움과 맞서 싸워야 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유한 사람들과 만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이번 한국 방문 스케줄을 보니 한국과의 스킨십을 늘려가는 모습이에요.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바람직한’ 방식으로 ‘되돌아온’ 기분을 느끼나요?
이제야 한국 이야기의 첫 장을 시작한 듯하네요. 2013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한국에 동료·친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덕분에 한국인의 사고방식, 정치·사회적인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예전보다 심리적으로 편안해졌고요. 유전자를 넘어선 운명의 끝이 이어지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제 활동이 프랑스와 한국, 더 나아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두보가 되길 바랍니다. [202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