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간 에너지가 쑥 빠지는 날들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왜 그럴까라고 생각했다. 도무지 뭔지 모르겠었다가 책에서 그 답을 찾았다. 바로 사람이 무관심을 느끼게 되면 에너지 레벨이 아주 낮아진다는 것.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내 피부는 건조하고 눈은 뻑뻑하고 근육들이 삐죽거리고 있다.
그런 것들을 보지 않으려고 해도 같은 팀이기 때문에 보고 느낄 수밖에 없다. 사소한 말 한마디, 메신저로 하는 말투, 행동들에서 다 묻어 나온다. 어제 팀장님의 한마디가 하루를 만들었는데 ‘왜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이 반갑지?’라고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주셨다. 다른 건 몰라도 나는 작년에 팀장복은 확실했다. 이제 나를 끌어올려주는 일만 남았지만.
요즘 드라마 ‘대행사’를 보고 있는데 일부 과장된 부분들이 있지만 유사한 부분들도 있어서 옛날 생각하며 재미있게 보고 있다. 대행사 직원 중에 고아인처럼 잘 살고 잘 나가고 멋있는 여성을 본 적이 없어서 아주 비현실적이지만 그래서 재밌다. 공감이 갔던 포인트들이 몇 가지 있는데 아래와 같다.
소위 ‘라인’이라고 하는데 보통 입사 할 때 어느 팀장 밑으로 가는지가 자동적으로 라인이 결정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힘 있고 라인 좋은 팀장 밑에 가면 편하게 일하는 거고 아니면 더럽게 힘든 회사 생활이 펼쳐진다.
나 같은 경우에는 광고대행사 다닐 때 굉장히 애매했던 게 능력 없이 막무가내로 일만 많이 하는 팀장 밑에서 일해서 아주 비효율적으로 야근만 많이 하고 성과는 없는 나날을 보냈다. 결국엔 회사에서는 라인이다.
대행사에 들어가려면 워라밸은 200% 포기한다고 보면 된다. 제안서 시즌에는 명절이고 주말이고 할 것 없이 다 출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 내가 데리고 있는 대행사는 집에 따박따박 잘 가서 사실 대행사 같지도 않다. 집에 가야 된다고 메일 보내는 거 보면 배가 이미 불렀다.
링거, 약, 병원을 끼고 살아간다. 제2의 회사가 병원일정도로 수시로 병원을 간다. 다니다 보면 돌아가면서 한 명씩 아프다. 갑상선항진증이 생긴 사람도 봤고 결국 회사를 그만뒀다. 나 같은 경우에도 링거 맞고 일하러 간 적도 있고 약도 많이 달고 살았다. 타이레놀은 당연히 필수적이었다.
술 없는 맨 정신으로는 하루하루를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일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다. 특히 광고주의 갑질을 받아주는 것이 가장 컸는데 점심시간, 퇴근시간, 주말 고려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이 왔고 말도 안 되는 요구들을 늘어놨다. 그래서 퇴근 후 한 잔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어야 그나마 다음날 출근할 수 있었다.
드라마 대행사에도 나오지만 항상 기획과 제작의 의견은 팽팽하게 갈린다. 서로 자기가 맞다고 주장하는 형국이다. 물론 나는 제작출신 기획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양쪽을 이해하는 편이지만 한쪽만 해서는 확실히 이해가 어려울 것 같다. 본래 프로세스가 기획-> 제작 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의견 조율 및 협업이 필수적인 구조다. 전 회사에서도 제작 쪽이 딴지 걸거나 하면 내부 광고주가 있다는 말도 많이 했었다.
사내에서든 사외에서든 대행사는 매일이 경쟁이다. 팀 내부에서도 다른 팀과도 경쟁을 해야 하고 비딩 시즌에 들어가면 누가 더 빌링 큰 건에 들어갈 건지 기싸움이 장난 아니다. 비딩을 따오면 인센티브가 나오기 때문에 당연히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집에 가지도 않고 사활을 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뭘 위해서 저렇게 까지 할까 라는 생각을 종종 하긴 했다. 건강, 인생 다 버려가면서 저렇게 사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회의감이 들었고 대행사를 나오게 된 이유 중 하나다. 같은 회사에서 서로를 이간질시켜서 자기가 올라가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대행사에 나갈 때는 총 두 개는 기본으로 장착하고 머리에는 헬멧을 쓰고 멘털 무장하고 나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 사내용 하나 광고주용 하나, 사내 정치질용 하나. 보통 대행사 생활 2년 버티면 '독종'이라는 소리를 듣는데 보통 1년 안에 8-90% 정도가 나가떨어지기 때문이다. 나도 있어봐서 알지만 3년쯤 있으니까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 있던 직원은 2명 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보통 광고주는 소위 '주님'이라고 하는 밥줄이다. 대행사가 살아가는 유일한 원동력이기 때문에 광고주에게는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아웃될 수 있다. 실제로 입사 초기에 뭣도 모르고 광고주를 일반적으로 대하다가 큰 코를 다친 적이 있었다. 갑질의 대명사는 곧 광고주다. 앞에서는 '머슴처럼' 뒤에선 무슨 욕을 하던 상관없다. 일만 잘하고 머슴처럼 군다면.
고아인을 보면 알겠지만 오로지 일에 자기의 삶을 바쳤다. 그랬기 때문에 그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다. 대행사 다닐 때 헤어진 커플 숱하게 보면서 느꼈다. 여기는 다닐 곳이 못 되는 곳이 구나라고. 한창 제일 이쁘고 재밌을 때 회사에 24시간씩 있는 걸 보면 나중에 돌아봤을 때 어떤 기억이 남을까? 결국 대행사에 다니면 일만 죽어라고 하거나 광고에 미쳤거나 둘 중 하나다. 물론 결혼 한 사람도 한 명 정도밖에 없었다. 결혼을 한 사람들은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중으로 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열심히 밤새고 일해서 다행히 성과가 좋게 나가도 결국 그건 광고주 성과로 돌아간다. 대행사는 단순히 '대행'을 해줬을 뿐이다. 머슴들이 열심히 일해서 작곡을 갔다 받치면 마님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대행사에게 남는 건 포트폴리오 그거 딱 하나다.
광고계에 오만정이 다 떨어지고 하나씩 다들 대행사를 떠나게 된다. 이직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아예 따른 업종으로 전환하는 사람도 꽤 많이 봤다. 단순히 회사가 싫은 게 아니라 이 업계에 이죽이 난 것이다. 사회복지 쪽으로 전환한 사람도 받고 국제무역 쪽으로 간 친구도 봤다. 오히려 제작 쪽은 이렇게까지 이죽이 난 사람들은 많이 보지 못했다.
이렇듯 대행사 라이프는 #치열하다. 대행사에 가고자 하는 사람이 이 글을 읽고 지레 겁먹을 수 있지만
이 정도는 알아야 기본적으로 어떤 느낌인지는 파악하고 가는 거라 도움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