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친구를 사귀다.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사촌누나의 친구의 친구. 그러니까 다소 먼 소개였다.
이름은 고르카. 누나의 친구가 마드리드 대학에서 공부할 때 알게 된 친구라고 했다.
그 친구는 누나네 과에서 꽤 유명한 ‘파티머신’이었다고 한다.
자기는 그 친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으며 이야기했다.
군대를 갓 전역한 나로선 파티머신이 뭘까, 파티는 또 어떤 걸까,
스페인은 어떤 곳일까—
상상만으로도 낯설고 묘한 기대가 피어올랐다.
산세바스티안에 도착한 뒤, 고르카와는 페이스북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만나기로 한 날, 솔직히 좀 많이 긴장됐다.
하우스메이트들은 내가 스페인어가 서툴다는걸 알았지만,
‘진짜’ 스페인 사람을 직접 만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긴장되는 일이었다.
만남 당일.
어학원 수업을 열심히 듣고, 점심을 먹고, 숙제를 하고, 산책까지 마쳤지만
약속 시간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고르카는 저녁을 먹자며 오후 7시 30분에 보자고 했다.
그때의 나는 그 시간이 꽤나 이상하게 느껴졌다.
‘저녁을 먹자고 해놓고 왜이렇게 늦게 보자는 거지?
저녁 먹고 만나자는 건가?
아니면 저녁을 두 번 먹자는 건가?’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7시 30분은 나를 배려한 시간이었다.
스페인에선 보통 저녁을 9시쯤 먹는다.
그는 일찍 만나 바에서 맥주 한잔 나누고,
9시쯤 식당에 가자는 계획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몰랐지만, 저녁은 둘이 먹는 자리가 아니었다.
고르카의 학교 친구들이 함께였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난 얘랑 약속했는데 왜 다른 사람들이 오는 거지?’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원래 친구들끼리의 모임에
내가 초대된, 말하자면 끼게 된 거였다.
7시 30분, 구시가지 입구 맥도날드 앞으로 나갔다.
5분쯤 지나, 키 크고 덩치 큰 한 사람이 다가오며 “Hola” 하고 인사했다.
그게 고르카와의 첫 만남이었다.
금발 머리, 파란 눈.
큰 키와 다부진 체격.
한국 사람이 ‘서양인’ 하면 떠올릴 법한 전형적인 이미지였다.
인사를 하고 나서야 알게 됐다.
고르카의 스페인어는, 내가 아는 스페인어가 아니었다.
입 안에 감자 두 개쯤 넣고 말하는 느낌이랄까.
그는 열심히 이야기했고, 나는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렇게 웃으며 넘겼고, 나중엔 2년 가까이 같이 살기까지 했지만—
그의 말은 끝내 또렷하게 들린 적이 없었다.
고르카와 서툰 스페인어로 대화를 나누며 바에 도착했다.
맥주를 한 잔 마시고 있으니 친구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쿠바에서 왔다는 엠마누엘.
하지만 본명으로 불리는 일은 없었다.
모두가 그를 ‘쿠바노’라고 불렀다.
다크서클이 심해 ‘판다’라는 별명을 가진 호세도 있었다.
그들이 스페인어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며 맥주를 마시는 모습은
묘한 감정을 일으켰다.
한국에서 대학 친구들과 한국어로 자유롭게 떠들던 장면이 겹쳐졌고,
그 익숙한 풍경이 지금 눈앞의 낯선 장면과 충돌하면서
이질감과 신기함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게 스페인의 삶이구나.’
그러면서도
‘나도 언젠가 저렇게 스페인어로 웃고 떠들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기대가 가슴속에서 동시에 부풀었다.
한참을 떠들다가, 예약한 식당으로 이동했다.
타코와 엔칠라다를 파는 멕시코 식당이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8시 30분, 식사 시간이라더니 자리에 우리밖에 없었다.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 맥주를 시켰고, 나도 따라 한 잔을 주문했다.
10분쯤 지나자 친구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고르카가 나를 소개했고, 다들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자리에 앉았다.
어느새 열 명 가까이 모였지만,
아무도 메뉴판을 펼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오늘 정말 제대로 먹을 생각으로
점심도 대충 먹고, 핀초도 거절했는데
이 친구들은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수다만 떨었다.
배는 고팠고, 말은 통하지 않았다.
익숙한 식탁 풍경이 눈앞에 있는데,
나는 그 식탁의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해 옆에 앉은 고르카에게 물었다.
“저기… 혹시 밥은 언제 나와?”
그는 웃음을 터뜨렸고, 그 말은 친구들에게 전해졌다.
모두가 와하하 하고 웃었고, 그제야 메뉴판이 돌아왔다.
하지만 메뉴판은 잠깐이었다.
그들은 몇 마디 나누더니 이내 우르르 주문을 마쳤고,
나는 첫 문장을 읽기도 전에 웨이터는 사라져 있었다.
잠시 후, 타코와 엔칠라다, 나초 같은 음식들이 차려졌다.
‘음식을 시킨다’기보다는,
그냥 자연스럽게 식탁 위에 펼쳐진 느낌이었다.
음식 맛은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낯선 음식 앞에서 묘하게 작아졌던 내 기분이 더 또렷하다.
설레면서도 어색했고, 궁금했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 식당은 그날 이후 다시 갈 일이 없었다.
어느 날 보니 폐업했고,
몇 년 뒤엔 내가 일하던 비스트로 바의 프렙 주방으로 바뀌어 있었다.
처음엔 낯설고 특별한 공간이었지만,
나중엔 야채를 다듬고 고기를 손질하던
지극히 일상적인 작업 공간이 되었다.
식사는 오래전에 끝났고,
이야기만 계속되다 보니 자리를 뜬 건 11시 무렵이었다.
이제 집에 가겠거니 싶었는데,
너무나 자연스럽게 모두가 어느 골목 바에 들어섰다.
낮엔 핀초를 파는 곳이었지만,
밤이 되자 테이블과 의자가 치워져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이 도시엔, 밤마다 무대가 되는 바들이 있다는 걸.
고르카는 술을 주문하라 했다.
맥주는 질렸고, 다른 건 몰랐다.
“지금 마시는 게 뭐야?”
그가 내민 잔은 보드카에 레몬 탄산이 섞인 단순한 술.
지금은 익숙한 맛이지만,
그날의 나는 그 한 잔조차도 처음이었다.
6유로짜리 투박한 잔.
보드카의 알코올 향과 인공적인 레몬 향.
취기가 금세 올라왔다.
그리고, 난생처음 듣는 라틴 음악에 맞춰
마음 가는 대로 춤을 췄다.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당연했다.
다들, 나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취해 있었으니까.
조금만 튀는 행동에도 수군거리던
한국과는 전혀 다른 풍경.
‘참, 자유롭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그랬다.
고르카가 나를 바텐더에게 데려갔다.
그리고 샷잔에 짙은 빛의 술이 따라졌다.
“오늘 친구 된 기념이야.”
나는 웃으며 그대로 들이켰다.
예거마이스터.
약초 향이 진한, 평소라면 절대 마시지 않을 술.
그런데 이상했다.
그날의 예거는 나를 환영하는 향처럼 느껴졌다.
그조차 반가웠다.
그 뒤로의 기억은 거의 없다.
아침 7시까지 놀았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어떻게 집에 왔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 파브리스가 커피를 마시려 나왔다가
주방 바닥에 쓰러져 자고 있던 나를 발견하고 방으로 옮겨줬다고 한다.
나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 장면만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집에 가기 전,
고르카와 단둘이
간판도 없는 어느 가게에 들렀다.
거기서 우리는 감자튀김과 핫도그를 먹었다.
미친 듯이 맛있었다.
이상한 건,
그 후로 8년을 더 살면서도
그 가게가 문을 연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
그 골목을 수도 없이 지났는데도
그날 밤 이후,
그곳은 사라진 듯 보이지 않았다.
혹시 착각이었을까?
꿈이었을까?
그런데 고르카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 후로는 나도 안 가봐서… 잘 모르겠어.”
그는 애매하게 웃었다.
진짜였을까?
아니면, 그날 밤의 흥분이 만들어낸
우리만의 작은 환상이었을까.
그날은 친구가 생긴 날이자,
처음으로 ‘스페인에 속한 나’를 느낀 날이었다.
낯선 도시의 밤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그 밤이 끝나지 않길 바랐다.
‘조금만 더 있어볼까?’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처음으로,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날의 레시피 : Vodka Lemon Cocktail
재료 (1잔 기준)
Absolute vodka 60ml
레몬에이드(아무거나) 180ml
얼음
조리법
잔에 얼음을 먼저 넣고 보드카와 레모네이드를 순서대로 부어준다. 가볍게 저어 바로 마신다.
팁
고르카처럼 마시고 싶으면 레몬에이드를 1/3으로 줄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