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가 두려워 망설이던 날들, 그리고 따뜻한 위로
한계에 다다랐다.
요리를 전혀 할 줄 몰랐기에, 한 달 넘게 빵과 치즈, 고기, 샐러드로 끼니를 때웠다.
한국에선 하루 세끼 내내 한식을 먹던 나에게, 그건 고역이었다.
짐을 줄이겠다며 라면조차 챙기지 않았던 걸, 그때만큼 후회한 적도 없었다.
(사실 아시안 마트는 어학원 근처에 있었고, 라면도 팔았다는 건 훨씬 나중에야 알았다.)
밥솥은 챙겨 왔지만, 밥을 한 번도 지어본 적이 없었다.
쌀도 사본 적이 없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조차 막막했다.
쌀밥이 그리웠다.
어릴 적 나는 허약한 체질이라 늘 보약을 달고 살았다.
입이 짧아 뭐든 겨우겨우 먹었지만, 보약을 먹은 날엔 이상하게 밥을 두세 공기씩 뚝딱 해치웠다.
그게 버릇이 되어, 체질이 바뀐 뒤에도 쌀밥만큼은 늘 두세 공기를 먹었다.
아무리 다른 걸 먹어도, 하루에 한 끼는 꼭 쌀밥이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그런 내가, 한 달 넘게 밥을 못 먹고 있었다.
고역이었다.
지금처럼 유튜브에 ‘밥 짓는 법’을 검색하면 다 나오는 시대가 아니었다.
블로그에도 설명은 있었지만, 그렇게 친절하지는 않았다.
사실은, 밥과 물을 동량으로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 일이었지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란, 늘 괜히 겁을 준다.
'혹시 망치면 어쩌지...' 생각만 많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습기만 하다.
그냥 한번 망쳐보면 그만일 일을, 왜 그토록 무서워했을까.
하지만 그때의 나는(그리고 지금의 나도)
실패하고 망가지는 일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워했다.
그래서 밥을 짓기로 마음먹기까지,
며칠을 전기밥솥만 바라보며 망설였다.
결국 용기를 내어,
당시 몇 안 되던 ‘스페인에서 한식을 해 먹는 블로거 중 한 분께 조심스레 쪽지를 보냈다.
보낸 쪽지의 내용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런 따뜻한 답장이 돌아왔었다.
그날 밤, 쪽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행여나 실수를 하지 않을까,
반복해서 숙지한 밥 짓는 법.
그리고 다음 날, 드디어 밥솥 뚜껑을 열었다.
낯선 나라의 부엌에서, 생전 처음 쌀을 씻고 물을 맞췄다.
어색한 손놀림으로 쌀을 불리고,
조심스레 ‘취사’ 버튼을 눌렀다.
밥이 되는 동안 주방에 퍼지던 냄새는
그 어느 고급 레스토랑의 향보다 따뜻했다.
익숙한 냄새는 곧 익숙한 그리움으로 이어졌고,
나는 그제야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진미채 볶음을 떠올렸다.
엄마가 혹시 모르니까 먹을 게 없을 때 먹으라고 챙겨준 몇 안 되는 반찬 중 하나였다.
엄마도 몰랐겠지.
내가 한 달 넘게, 밥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지낼 줄은.
플라스틱 용기의 뚜껑을 열자
달큼한 고추장 양념 냄새가 스르르 번졌다.
밥을 기다리며 집어든 진미채 한 가닥은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렸던 사람이 기억을 되찾은 것 마냥
반쯤 상실됐던 미각이 돌아온 기분이었다.
밥솥이 ‘삐- 삐- 삐-----’ 소리를 내며 조용해졌을 때,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김이 몽글몽글 피어오르며,
하얗고 따뜻한 밥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걱으로 밥을 저어봤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쌀밥이 맞았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접시에 밥을 가득 퍼담았다.
숟가락으로 조심스레 떠올린 첫 술,
그 위에 진미채 볶음을 살짝 얹었다.
그리고 한입.
그 순간, 이상하리만치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맛있다, 따뜻하다, 그리웠다, 다행이다.
그 모든 감정이 한 입 안에서 차례로 터져 나왔다.
낯선 도시에서 처음으로 내 손으로 지은 밥,
그리고 엄마의 손맛이 깃든 반찬.
메인 반찬이 없으면 밥을 먹지 않던 나였는데,
그날은 달랐다.
그날만큼은, 진미채 하나면, 충분했다.
며칠 뒤, 내가 학원에 가고 없을 때였다.
거실에 놓인 밥솥을 본 헥또르는 CD 플레이어인 줄 알고 버튼을 눌렀단다.
그런데 뚜껑이 ‘휙’ 열리자, 안에는 따끈한 밥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깜짝 놀란 그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웃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헥또르는 “네 밥솥은 음악 대신 밥이 튀어나오잖아!” 하며
여전히 배꼽을 잡았다.
그 뒤로 파브리스와 헥또르는
“넌 왜 이렇게 맨날 쌀만 먹냐”라고,
“혹시 쌀로 만든 나라에서 왔냐”는 농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웃으면서도,
그 말이 어쩐지 조금 따뜻하게 들렸다.
그들이 내 ‘쌀밥’이라는 일상까지 알아주는 것 같아서.
▪ 재료
진미채 200g
▪ 양념
고추장 3큰술
고춧가루 1큰술
다진 마늘 1큰술
진간장 1큰술
설탕 2큰술
물엿 2큰술
미림 4큰술
식용유 2큰술
물 약 10큰술
▪ 만드는 법
1. 진미채는 찬물에 한 번 헹궈 짠맛을 줄이고, 촉촉함을 더해준다.
2. 물기를 살짝 짠 뒤, 먹기 좋은 크기로 가위로 자른다. 잘게 자르면 서로 엉키지 않고 밥 위에 올려 먹기도 좋다.
3. 넓은 팬에 양념 재료(고추장~식용유)와 물을 함께 넣고, 약불에서 양념을 끓인다.
4. 양념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며 농도가 잡히면, 불을 끄고 진미채를 넣는다.
5. 불을 끈 상태에서 골고루 무쳐주면 완성.
▪ 팁
진미채는 불에 오래 익히지 않아야 부드럽고 촉촉하다.
미림이 들어가면 비린 맛이 줄고, 전체 풍미가 더 부드러워진다.
밥 위에 올려 한입 먹으면, 그날의 기억처럼 마음속에 스르르 녹아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