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따따스 브라바스 - 세 사람이 만든 저녁의 풍경

파브리스와 헥또르

by 최환석

산세바스티안에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이사를 했다.


어학원 숙소는 비싼 가격에 비해 너무 불편했다.

편의시설은 없고, 인터넷도 되지 않았으며, 교통도 불편했다.


무엇보다, 하우스메이트들은 영어만 사용해서

스페인어를 쓸 일이 거의 없었다.


조금 익숙해진 공간을 떠난다는 건 분명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계속 머물 만큼 좋은 점도 딱히 없었다.

결국, 결심을 하고 새로운 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사한 곳은 이전의 조용한 주택가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산세바스티안 구시가지 한복판.

좁고 굽이진 골목길 사이에 낀, 오래된 석조 건물의 3층이었다.


창문 너머로는 바다가 보였고,

거리에서는 언제나 누군가의 웃음소리나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시끄럽긴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소란스러움은 외롭지 않았다.


거실은 오래된 나무 마룻바닥 위 테이블에 흩어진 맥주병과 재떨이,

그리고 어제 본 듯한 신문들로 늘 조금은 지저분했고,

주방에는 삶아둔 파스타 냄비가 언제나 하나쯤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곳에서는 늘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냈던 산세바스티안의 구시가지, parte vieja. 왼쪽 윗편에 살짝 튀어나온 창이 내가 살던 집이다.

이사를 하면서 새로운 하우스메이트들도 생겼다.

파브리스와 헥또르.

처음엔 조금 어색했지만, 금세 정이 들었다.



파브리스는 프랑스에서 온 신문 기자였다.

갈색 머리에 키가 크고, 눈빛은 언제나 선했다.

스페인 관련 기사를 쓰는 특파원이라고 했는데, 말투엔 프랑스 억양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어학원 수업이 끝나면 주로 파브리스와 오후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내 스페인어에도 프랑스 억양이 섞였고,

한동안은 “프랑스어도 할 줄 아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스몰톡에 능했다.

마주칠 때마다 “¿Qué tal estás, Choi?”라며 웃었고,

별일 아닌 이야기들도 유쾌하게 풀어냈다.

그 덕에 나도 조금씩 말을 건네기 시작했고,

지금도 누군가를 만나면 습관처럼 스몰톡을 건네게 된다.


헥또르는 멕시코 출신이었다.

나보다 나이가 좀 있었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머리는 약간 벗겨져 있었다.

항상 거실에서 맥주를 마시며 롤링타바코를 말아 피웠다.

말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말투엔 늘 여유가 배어 있었다.


운동을 좋아하던 그는 바닷가에 가면 한참을 수영하고 돌아왔다.

“피곤하지 않아?”라고 물으면,

“El mar lo cura todo.”라며 웃었다.

(바다는 모든 걸 치유해준다고.)



저녁이면 셋이 거실에 모여 TV를 봤다.

뉴스나 영화, 예능 같은 프로그램을 틀었지만,

내가 잘 알아듣지 못하자 어느 날은 텔레토비를 틀어줬다.


말이 느리고 표현이 단순해서, 의외로 도움이 많이 됐다.

파브리스와 헥또르는

이 나이에 텔레토비를 본다며 웃었고,

감자칩을 집어 먹으며 화면을 함께 바라봤다.


국적도, 언어도, 나이도 달랐지만

이상하게 그들과 있으면 마음이 놓였다.

그 시절, 하루 중 가장 따뜻했던 시간은

그들과 거실에 나란히 앉아 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 평온한 날들 속에서,

날씨 좋은 날이면, 우리는 함께 산책을 나갔다.

구불구불 좁은 골목이 이어진 구시가지를 지나

라 꼰차 해변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어학원 생활 이야기, 문화 차이, 좋아하는 음식,

서로의 나라 이야기,

그리고 산세바스티안에 오기 전의 삶까지.

우리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이제 잘 기억나지 않지만,

서툰 스페인어로 더듬거리던 나와

그 말을 끝까지 들어주던 두 친구의 따뜻함은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익숙하지만 항상 좋았던 구시가지
Playa de la Concha. 조개껍데기처럼 휘어진 곡선의 해변은, 언제나 산세바스티안의 얼굴이었다.


그렇게 해변을 걷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저녁은 늘 바다 냄새가 스치는 골목에서 마무리됐다.


집으로 들어가기엔 조금 아쉽고,

요리를 하기엔 괜히 귀찮은 날이면

어김없이 집 아래에 있는 ‘La Mejillonera’로 향했다.


핀초 바라고 하기엔 메뉴가 꽤 단출했다.

빠따따스 브라바스, 홍합, 오징어 튀김.

정말 그게 전부였지만,

단출한 만큼 맛은 확실한 집이었다.


처음엔 하우스메이트들과 함께 가봤고,

그 뒤로도 단골처럼 자주 되었다.

여름 저녁, 언제 가도 바글바글했던 La Mejillonera의 입구.

‘La Mejillonera’는 산세바스티안과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안달루시아 분위기가 더 짙은 공간이었다.


안달루시아에서 자주 보이는 아랍식 패턴의 파란 타일,

성의 없이 켜진 하얀 형광등,

그리고 소박한 메뉴들.


나무 느낌을 살린 투박한 산세바스티안의 핀초 바들과는

결이 다른 그런 곳이었다.


하지만 정작 가장 낯설었던 건,

매번 주문을 맡게 되는 나 자신이었다.

으레 음식을 시킬 때면,

본인들이 해도 될 주문을

“스페인어에 익숙해지라”며 꼭 나에게 시켰다.


“Media ración de patatas bravas, un calamar frito y tres cañas, por favor.”

(빠따따스 브라바스 반접시, 오징어 튀김 한접시 그리고 맥주 3잔 주세요.)


지금은 아무렇지 않게 나오는 문장이지만,

그땐 왜 그토록 버겁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친구들이 매일 시켰던 ‘훈련’ 덕분이었을까.

어느새, 그 말들이 입에 붙어 있었다.



처음 먹어본 브라바스는,

마요네즈의 느끼함을 빨간 소스의 매콤새콤한 맛이 산뜻하게 잡아주었다.


퍽퍽한 감자에 소스를 듬뿍 찍어 먹으면

촉촉한 감칠맛이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소스의 여운이 남고,

목이 막힐 즈음 바스크 맥주 ‘Keler’를 한 모금 마시면

“이런 게 바로 행복이구나”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


오징어 튀김은 한국과 달리 튀김옷이 아주 얇았다.

자칫 오래 튀기면 질겨질 수 있는 오징어를

속은 촉촉하게, 겉은 바삭하게 튀겨낸 솜씨가 인상 깊었다.


이 또한 브라바스 소스에 찍어 먹으면

말없이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맛있었다.

빠따따스 브라바스, 이쑤시개로 집어먹으며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투박하게 튀겨졌지만 섬세한 오징어튀김, 그리고 무심하게 잘라낸 바게트. 그날의 저녁은 그런 것들로 충분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을 나눴다.

말은 서툴렀고, 문화는 달랐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돌아보면, 그 시절의 산세바스티안은

우리 셋이 만들어낸 작은 안식처였다.


그 친구들이 있었기에,

낯선 도시는 낯설지 않았다.



그날의 레시피 : 빠따따스 브라바스(Patatas bravas)


재료


감자

매운 파프리카 가루 1큰술 (pimentón picante)

건고추 2개 (cayena, 또는 마른 홍고추 대체 가능)

계란 1개

마늘 1쪽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

해바라기유

소금

(선택) 쪽파 또는 차이브 (고명용)


만드는 법

1. 감자는 껍질을 벗겨 원하는 크기로 썬다.(너무 얇지 않게, 큐브 모양이 적당하다.)

2. 먼저 해바라기유를 넉넉히 두른 팬에서 중불로 튀긴다.

노릇하기보다는 겉이 익는 정도까지만 튀기고, 키친타월에 올려 기름을 뺀다.

3. 잠시 식힌 후, 다시 센 불에서 두 번째로 튀긴다.
이번에는 겉이 노릇하게 바삭해질 때까지만 짧게 튀긴다.(두 번 튀기면 겉바속촉 완성.)

4. 튀긴 감자에 소금을 약간 뿌려 간을 맞춘다.


매운 오일 만들기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에 매운 파프리카 가루 1큰술, 잘게 부순 건고추 2개,

소금 한 꼬집을 넣고 섞는다.

(불에 올리지 않고 차게 섞는 소스.)


알리올리 만들기

믹서컵에 다음 재료를 넣는다:

해바라기유 150ml,

엑스트라버진 올리브오일 한 스푼,

계란 1개,

마늘 1쪽,

소금 약간.

핸드 블렌더를 컵 바닥에 고정하고 30초 정도 돌린다.

그 후 천천히 블렌더를 위로 올리며 전체를 섞는다.

(마요네즈처럼 되직한 질감이 되어야 한다.)



감자를 소스에 찍어 먹는 것도 좋지만, 소스를 미리 얹으면 감자에 스며들어 더 맛있다.

바삭한 감자에 매콤하고 고소한 두 소스가 만나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 절로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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