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움의 과잉, 혹은 복제된 개성의 사이에서
뉴타운을 걷다 보면, 자유롭다는 감정이 마치 벽마다 붙어 있는 듯하다.
하지만 벽에 그려진 그래피티와 벽화들은 자유나 일탈보다는, 오히려 잘 기획된 이미지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그 자유로움은 때때로 과잉처럼 다가온다.
자유로움의 과잉, 혹은 복제된 개성의 사이에서.
나는 이 거리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뉴타운 역에서 나오자마자, 히피풍의 한 여자가 길 위에 앉아 있었다.
본인이 입던 옷가지와 액세서리를 천 위에 펼쳐놓고 팔고 있었고,
작은 스피커에서는 자메이카풍 레게 음악이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보도와 차도 사이, 애매한 위치에 앉아 있었지만
그녀는 마치 거리를 소유한 사람처럼 당당했다.
그 모습은 이 동네의 분위기를 단번에 설명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메인 스트릿을 걷다보면,
그 자유로움에는 일종의 강박이 깃들어 있었다.
비슷한 간판, 비슷한 카페, 비슷한 분위기의 내추럴 와인 바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있었다.
모양은 달라도, 모두가 ‘다르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 안에 놓인 듯한 거리.
뉴타운에선 이렇게 입고, 이렇게 먹고, 이렇게 커피를 마셔야 할 것만 같은
묘한 압박감이 무심하게 퍼져 있었다.
무질서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통제된 자유.
그 거리의 리듬 속에서, 나는 이 동네의 역사가 문득 궁금해졌다.
사실 이곳은 원래 ‘자유’와는 거리가 먼 땅이었다.
식민 이전에는 이오라족 카디갈 부족의 터전이었고,
식민지 시절엔 작고 황량한 농장과 과수원이 흩어져 있던 변두리에 불과했다.
19세기 후반, 빅토리아풍 테라스 하우스가 들어서며 시드니 최초의 교외 쇼핑 거리로 성장했고,
20세기 중반에는 노동자 계급과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서민 동네가 되었다.
그러다 60~70년대, 시드니대 인근의 저렴한 임대료를 따라 예술가와 학생들이 유입됐고,
거리엔 카페와 서점, 벽화와 퍼포먼스, 퀴어 커뮤니티가 꽃피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뉴타운은 ‘자유’와 ‘다양성’의 상징처럼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 역사 위에 오늘날, ‘힙스터 성지’라는 이미지가 겹겹이 덧씌워졌다.
하지만 이 거리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건,
자유롭다는 감정보다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욕망이었다.
개성 넘친다기보단 개성 있어 보이고 싶은 연출,
모두가 다른 콘셉트를 내세우지만
결국 비슷한 냄새가 나는 거리.
내추럴 와인 바, 플랜트 베이스 카페, 재활용 가구 인테리어.
각기 달라 보이지만 모두 ‘힙’해야 한다는 공식 속에 들어가 있었다.
이는 단지 내 개인적인 느낌이 아니었다.
뉴타운의 힙스터스러움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거리의 정체성이지만,
지금은 그 정체성마저 브랜드처럼 소비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90년대 이후의 급격한 젠트리피케이션은,
예술가와 학생이 살던 동네를 중산층과 트렌드를 좇는 소비자들의 놀이터로 바꿔 놓았다.
“뉴타운이니까 이런 느낌이어야 해.”
이 강박은 상점의 간판, 사람들의 옷차림, 대화의 어투에까지 은근히 스며들어 있다.
지역 언론은 이를 ‘자기복제적 힙스터 문화’라고 비판한다.
실제로 걷다 보면 누군가의 개성이 아니라,
‘뉴타운이라서 꾸며진 듯한’ 공간들이 곳곳에 보인다.
개성 있는 듯하지만, 알고 보면 트렌드 매뉴얼 위에 놓인 가게들.
실험적인 듯하지만, 알고 보면 예측 가능한 공식.
그럼에도 이 거리엔 오래된 중고서점이 있고,
골목 한편에서 락앤롤을 외치며 오래된 LP판을 파는 사람들도 있고,
퀴어 커뮤니티가 안심하고 걷는 골목이 남아 있다.
그 이중성.
뉴타운은 어쩌면 그 위태로운 균형 위에 선 거리다.
진짜 자유와 연출된 자유. 그 사이 어딘가에서 계속 자신을 재정의하는.
뉴타운에 오기 전, 구글 지도를 켜고 식당을 뒤적여봤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흔한 기대감조차 생기지 않았다.
눈길을 끄는 곳도, 궁금증을 자극하는 메뉴도 없었다.
뭔가 한 끼는 먹어야 할 텐데, 어쩐지 설렘이 없었다.
그러다 평이 괜찮은 어느 내추럴 와인바에 들어가게 됐다.
가게 앞 인도엔 작은 테이블 몇 개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잔을 올려놓은 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그 장면조차 묘하게 힙해 보였다.
나는 사실 내추럴 와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술을 즐겨 마시는 편도 아니고,
정직하게 말하자면 일반 와인과의 차이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곳은 와인을 파는 보틀샵이기도 했는데,
진열대 위엔 알록달록한 라벨의 병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디자인은 예뻤지만, 가격표를 보는 순간 망설여졌다.
솔직히, 너무 과하다고 느껴졌다.
결국 와인은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짧은 시간 동안 가게의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손님을 반쯤 방치한 채 바 안쪽에서
직원들끼리 와인을 나누며 웃고 있던 장면이었다.
그 모습은 무례하다기보다는, 어떤 방식의 ‘태도’처럼 느껴졌다.
이 동네의 자유로움은 어디까지 허용되고,
어디까지 연출되는 걸까.
식당들의 스타일은 겉보기엔 제각각이었다.
오리지널 요리에 현대적 해석을 덧입은 퓨전, 플랜트 베이스를 내세운 공간, 윤리적 소비를 강조한 메뉴들.
분명 그 안에는 의미 있는 시도들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몇 군데를 지나면서부터 반복되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 와인바에서나 볼 수 있는 칼라마리 프리토,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칠리 오일 위에 올려진 ‘수제’ 덤플링,
그리고 빠지면 섭섭한 플랜트 베이스 버거.
서로 다른 콘셉트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 식탁 위엔 묘하게 닮은 클리셰가 겹쳐지고 있었다.
“뉴타운이라면 이래야 하지 않을까”라는 전제가
각기 다른 방향을 흉내 내면서도, 결국 같은 결을 만들어내고 있는 듯했다.
특히 플랜트 베이스 카페와 레스토랑은 골목마다 눈에 띄었고,
그중 일부는 확고한 철학보다는 ‘지향하는 이미지’를 먼저 보여주려는 태도가 강하게 느껴졌다.
마치 식단이라기보다는, 공간의 정체성을 꾸미는 장식처럼 보였달까.
물론 모든 곳이 그랬던 건 아니다.
가치와 실천이 조화롭게 느껴지는 공간도 분명 있었다.
다만 그런 곳을 찾기 위해선, 겉모습 너머의 태도를 먼저 읽어내야 했다.
결국 서로 다른 간판 아래 놓인 그 식당들은
묘하게 닮은 공기 속에 함께 있었다.
분위기는 조금씩 달랐지만, 어딘가 익숙한 조합의 반복.
다른 골목을 걷고 있음에도, 마치 아까 지나온 길을 되짚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막연한 감각은, 거리를 더 걸을수록 점점 확신으로 굳어졌다.
메뉴를 훑고, 분위기를 살피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나와 아내는 아무것도 고르지 못한 채
조용히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뉴타운 역 입구에 다시 이르렀다.
아까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고,
그 옆엔 비슷한 옷차림의 남자 셋이 더 앉아 있었다.
작게 흐르던 음악은 퇴근길의 소음 속에서도 더 크게 들렸다.
자메이카풍 리듬에 맞춰 고개를 까딱이는 사람들,
그 곁을 스쳐 지나가는 이들조차 모두 자신만의 리듬을 갖고 있는 듯 보였다.
뉴타운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뚜렷했다.
빈티지 바지, 과감한 액세서리, 낡은 가죽 부츠, 뜨개질한 듯한 에코백.
그들의 스타일은 모두 달라 보였지만, 어느 순간 문득 깨달았다.
다름을 연출하는 방식이 이상하리만치 닮아 있다는 사실을.
그건 진짜 자유로움이라기보단,
자유로워야 한다는 암묵적 전제 속에서 반복되는 선택처럼 느껴졌다.
뉴타운에는 지금도 거리 곳곳에 ‘자유’를 상징하는 풍경들이 걸려 있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그곳에 흐르는 공기가
조금은 연출된 자유, 과장된 자유로움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진짜 자유란 어쩌면, 그것이 연출된 것인지 아닌지조차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느끼는 상태일지도 모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