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모든 리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나하면둘 Oct 24. 2019

<블러드 심플> 리뷰

제목인 <블러드 심플>은 "사람이 누군가를 죽이고나면 머리는 물컹해진다. 블러드 심플" 이라는 하드보일드의 대가 대실 해밋의 소설에서 따왔다고 한다. 하드보일드와 누아르의 정신이랄까?


    이 영화는 장르 영화라기 보다, 장르에 대한 영화로써 봐야만 한다. 이는 영화가 장르의 속은 비우고, 외피로만 내용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보통의 경우 장르는 수단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양들의 침묵'과 같은 영화는 스릴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내부의 이야기 속에는 여성인 스털링이 FBI란 남성적 집단에서 받고 있는 억압과 그에 따른 성장이 있다. 스털링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따온 '양들의 침묵'이라는 제목에서부터 이 영화는 이러한 스털링 내부의 서사임을 드러낸다. 대개 이런 내적 플롯이 탄탄할수록, 영화의 완성도 역시 높아진다. 어차피 장르란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코엔 형제의 경우 장르는 그들의 목적이자 수단 그 자체이다. 마치 앤디워홀의 그림처럼 의미 없음이 또 다른 의미를 만들어 낸다. 특히 이 영화에는 껍데기만 있고 내용물은 없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장르적 완성도와는 달리, 그 속에 무엇이 담겨있냐고 물으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관객은 이 영화의 인물들에게 감정이입 할 수 없다. 영화에는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지만, 우리는 누구의 죽음에도 안타까움을 느낄 수 없다. 이는 분명한 연출의도다. 코엔형제는 일부러 인물들에게 거리를 두고, 관객에게는 충분한 정보를 전해주지 않는다. 사립 탐정에게 살해를 의뢰하는 남편을 이해하려면 그가 아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나와야 한다. 아내의 외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편의 잘못을 설명해야 한다. 여자를 위해 시체를 은닉한 레이를 이해하려면 그가 여자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코엔형제는 이들의 감정의 역사를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에 인물들을 무작정 그들이 짜놓은 장르적 상황 속으로 던져버린다. 아내의 외도를 알아챈 남편은 그들의 살해를 의뢰하고, 탐정은 돈을 위해 이들을 죽이기보다 남편을 살해하고, 외도의 대상인 레이는 여자가 남편을 죽였다고 생각해 그 시체를 은닉한다.   

사람이 죽어있는 식탁 위에 올라와 있는 생선대가리

    사실 코엔 형제는 이 상황이 어떠한 감정으로 인해 비롯되는지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어보인다. 감정이 아닌 상황과 플롯만 존재하는 이 영화의 기가 찬 점은 여기에 서스펜스와 장르적 재미는 가득하다는 점이다. 우선 완성도 높은 플롯 그 자체가 긴장감을 조성한다. 아내의 외도에서 시작되는 살인의 고리는 남편이 그녀에게 선물한 리볼버와 같은 연결고리를 통해 종국에 탐정의 죽음으로 끝난다. 촘촘하게 연결되는 이야기에는 관객이 숨 쉴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장르의 규칙을 따르면서도, 하나 하나의 장면은 어딘가 뒤틀려 있다.  시체를 은닉하는 곳이 아무도 오지 않을 법한 숲이 아니라 누군가 언제든 들이닥쳐도 이상하지 않을 대로변 옆 벌판이라든지, 사립탐정에게 착수금을 전달하는 엄숙한 장면에서 뜬금없이 끼어드는 생선대가리들이라든지. 하드보일드라는 장르적 상황과 어딘가 이질적인 요소들이 충돌하면서 이 장면들은 저마다 긴장을 만들어낸다.  

<블러드 심플>의 마지막 숏

    이 지점에서 영화는 일종의 블랙코미디처럼 느껴진다. 별 죄도 없는 사람이 죽어나가고, 그 시체를 은닉하는 이토록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상황에서 관객들이 느끼는 것이라고는 단지 스릴과 긴장감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관객의 잘못이 아니다.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윤리적 물음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수돗물에서 물이 떨어지려는 숏은 이 영화 자체를 의미하는 듯 하다. 총구와 닮은 그 수도 구멍에서 물이 대롱대롱 달려있을 때, 우리는 그 물방울이 떨어질까 떨어지지 않을까 궁금하고 긴장한다. 이 영화 전체가 그 숏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서스펜스란 그런 사람의 본능에서 비롯한다. 중요한 건 수도구멍과 물방울이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가 아니라, 그것이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로 이들은 자신들이 장르를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만약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봤다면 이들의 차기작이 매우 궁금했겠지만 사실 그에 대해서는 스포일러를 당한 상태다. 이 장르의 달인이자 기술자들은 이후 데뷔작보다 더 깊어졌고, 여러모로 더 나아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완성했다. <블러드 심플>은 이들이 기술적 면에서는 처음부터 완성되어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매거진의 이전글 <붉은 돼지> 리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