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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나하면둘 Feb 15. 2020

오늘의 리빙 포인트

감정의 물성

    토요일 아침에는 웬만하면 빨래를 한다. 일주일 내내 밀려있는 빨랫감을 처리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라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사실 그 별거 아닌 가사노동은 은근히 기분을 좋아지게 한다. 평일 밤이었다면 그건 필요에 의해 하는 가사노동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때는 토요일 아침이다. 10시쯤 느즈막히 일어나 빨래를 돌려놓고, 밖으로 나가 토스트 한 점과 아메리카노를 사온다. 그걸 마시면서 멍하니 빨래를 기다리고 있으면, 오늘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 것이나 해도 된다는 주말의 여유가 절로 느껴진다.옷을 널면서 잠깐 난방으로 갑갑한 집을 환기 시킬 때는, 섬유유연제 냄새가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말하자면 토요일 아침의 빨래는, 주말의 심리적인 행복감을 물리적으로 바꾸어내는 일이다.


    사실 사람은 아무리 고상한 척 해도, 결국엔 매우 물질적인 존재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마음의 병인 우울증에도 화학물질은 매우 효과적이고, 따뜻한 물에 하는 샤워가 때로는 그 어떤 것보다도 기분을 좋아지게 한다. 우울할 때 달콤한 음식을 먹으라든가 기분이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 가라는 등 SNS에서 유행하는 격언은, 감정에 관한 한 그 어떤 의사의 처방전보다도 정확한 처방이 되기도 한다. 인생이 무너질 것 같이 우울해 하다가도, 그저 별 거 아닌 것들에 어느새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내 감정이나 고민은 얼마나 가벼웠던 것인가 하고 씁쓸해지곤 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그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은 물리적 세계와 늘 영향을 주고받아서, 때로는 어떤 물건이 감정을 불러오기도 한다. 물성이란 무서운 것이다. 감정은 실체가 없으니 금세 사라지고 말기도 하지만, 물건은 늘 자신의 자리에서 이야기나 감정을 비축해둔다. 어렴풋이 떠돌던 감정은 물건이 가진 촉감, 냄새, 무게 등을 통해 현실 속에 내려앉는다. 내가 그걸 느낀 건 여자친구와 이별하고 난 다음이었다. 6년간의 연애가 끝났음을 통보받았을 때, 사실 나는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었다. 그냥 이렇게 끝나는 건가하고 조금 허탈한 감은 있었지만, 발라드 속에 나오는 이별 가사처럼 죽도록 슬프지는 않았다. 노래는 노래고, 현실은 현실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내가 정작 아팠던 것은 6년의 연애가 남긴 물건들을 정리할 때였다.


    손에 끼고 있던 커플링을 버릴 때서야 나는 비로소 헤어짐을 실감했다. 족히 4년을 거의 빼지 않고 끼고 다녔던 그 반지는 내 손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맞출 때에 비해서 살이 좀 찌는 바람에 반지를 빼도 누구나 그곳에 반지가 있었음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 기나긴 세월이 내 몸에 남긴 것은 그 작은 자국 하나뿐이라는 사실과, 사라진 반지가 지니고 있던 단 몇g의 무게감이 나를 너무 슬프게 했다. 반지 그 자체도 짜증났다. 어디에 갖다 팔수도 없는 몇 만원짜리 싸구려 반지는 내 사랑의 비루함과 가난함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 돈이 없어서 그걸 커플링이라고 해준 나와, 그럼에도 바보같이 좋아해주었던 착한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므로 이걸 빼는 일은 그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잘된 일일 것이었다. 그토록 착한 사람은 더 나은 사람을 만날 권리가 있었다. 반지를 버렸던 날, 그래서 나는 한참을 울었다.


    헤어진 후에 물건 정리를 똑바로 하지 않아서,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종종 슬퍼해야만 했다. 선물 받은 만년필, 챙겨주었던 약들, 그 사람의 낙서가 있는 노트, 영화 티켓, 사진들까지 온갖 것들이 잊을 만하면 어디선가 튀어나왔다. 우리 집의 침대나 이불, 심지어는 김치까지도 나를 괴롭혔다. 하필 식당에 가면 매일 나오는 김치에까지 사연이 있을 건 뭔가. 물건이야 말로 감정 그 자체임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쓰다보니 긴 서론이 된 것 같지만,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오늘의 리빙포인트를 하나 알려드릴까 한다. 여러분들은 별 거 아닌 것들을 조심해야만 한다. 특히 이별 후에는 물건을 아주 꼼꼼하게 처리해야 한다. 기왕이면 한꺼번에 태워버리는 게 좋다. 추억이 떠오를 틈도 없이 모조리 다 박스에 담아버리자. 작은 고추가 매운 법이므로 조그마한 물건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피가 큰 물건들도 웬만하면 교체를 권장하는 바다. 쓰다 보니 박스가 아니라 1.5t짜리 트럭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그 사람이 당신에게 차지했던 자리만큼, 큰 박스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그 후로 이사를 갔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사라지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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