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잃고> 김수영, <개여울> 김소월 리뷰
1. 네가 없음에도 나는 산다.
<너를 잃고> 김수영
늬가 없어도 나는 산단다
억 만 번 늬가 없어 설워한 끝에
억만 걸음 떨어져있는
너는 억 만개의 모욕이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은 꽃들
그리고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모래알 사이에 너의 얼굴을 찾고 있는 나는 인제
늬가 없어도 산다
늬가 없이 사는 삶이 보람 있기 위하여 나는 돈을 벌지 않고
늬가 주는 억 만 배의 모욕을 사기를 좋아하고
억만 인의 여자를 보지 않고 산다
나의 생활이 원주 우에 어느 날이고
늬가 서기를 바라고
나의 애정의 원주가 진정으로 위대하여지기 바라고
그리하여 이 공허한 원주가 가장 찬란하여지는 무렵
나는 또 하나 다른 유성을 향하여 달아날 것을 알고
이 영원한 숨바꼭질 속에서
나는 또한 영원한 늬가 없어도 살 수 있는 날을 기다려야 하겠다
나는 억만 무려의 모욕인 까닭에.
‘늬가 없이도 나는 산단다’. 김수영의 ‘너를 잃고’는 이러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런 말은 도대체 언제 나오는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말로 네가 없이 잘살 수 있을 때 하는 말 같지는 않다. 정말로 없어도 괜찮은 것이라면 구태여 말을 꺼낼 필요도 없을 테니까. 이 말은 정말로 네가 없이는 못살 것 같지만, 그럼에도 살고자 하는 것이 무릇 숨탄 것들의 본능이므로 살기는 살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너 없이 살아가는 삶은 네가 있는 삶과는 완전히 다를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네가 없이도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산단다”라고 말한다. 2연을 보면 네가 없을 때 명확하게 달라진 삶이 어떤지 묘사된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을 꽃들’, ‘별과도 등지고 앉아서’. 꽃이나 별과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도 네가 없이는 별 감흥이 없을 때, 살아간다는 것은 인생이었다가 그저 생존이 된다. 어떤 잃어버림은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내기도 한다. 시인에게 ‘너’는 그런 존재였다.
이 시를 처음볼 때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아마도 ‘너’를 ‘모욕’으로 표현한 부분일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이별이었길래, ‘너’는 모욕이 되었는가. 이 대목에서는 시인의 자전적인 삶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북한의 남침 이전에 결혼하여 살던 시인은 처음에는 북한의 의용군으로 잡혀가고, 이후에는 미군의 포로수용소에서 몇 년을 떠돌다가 비로소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그가 돌아온 집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그의 아내가 그의 선배이자 친구였던 이와 함께 살림을 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또 다른 소중한 사람에게 빼앗긴 신세가 된 시인은 동시에 두 사람을 잃었다. 물론 시인도 전란으로 힘든 시대에 아들을 부양해야하는 그녀가 홀로 살기는 힘들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절감할수록 고통은 늘어날 뿐이다. 내가 없는 삶을 선택한 그녀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타당하였으며, 그것은 결국 자리에 없었던 자신의 탓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때 그가 느꼈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너를 들여다볼수록 시인이 느껴야 했던 것은 다름이 아닌 자신의 허물이었을 것이며, 그러니 너는 나에게 ‘억 만개의 모욕’인 것이다.
내게 있어 이 시의 가장 눈물겨운 점은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그 자체에만 있지 않다. 나는 그가 잃어버림에 대처하는 방식도 눈물겹다. 화자는 당신이 없어진 후로는 돈도, 여자도 보지 않고 자신의 애정의 '원주'가 위대해지기만을 바란다고 한다. 민족주의자인 그의 삶을 보았을 때도, 시의 맥락으로 봤을 때도 이 말은 자신의 삶의 반경을 넓혀 앞으로는 자신의 사회나 민족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처럼 보인다. 다만, 이 다짐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우리는 이런 순간을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난 성공할 거야'라고 다짐한다든지, '이제 일에 집중하겠어'라고 다짐한다든지하는 일은 너무 흔하다. 하지만 이것은 진짜로 그렇게 하겠다는 결심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집중할 곳이 필요하고, 네가 없다는 현실에서 도망칠 어딘가가 필요해서 하는 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이것은 민족주의자의 단호한 결의가 아니라, 단지 실연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의 평범한 발버둥처럼 보인다.
또한 화자가 당신을 잃고나서도 계속해서 살아가야한다는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사실도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부분 중에 하나다.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을’, ‘억만 개의 모욕을 사는’ 삶일지라도, 화자는 살 수밖에 없음을 철저히도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 속에서 ‘늬가 없이’와 함께 가장 많이 반복되는 어구는 ‘산다’는 말이다. 시인은 이러한 사실이 부끄러웠을 수도 있겠다. 그토록 소중한 너였으나 네가 없는 삶을 끊어낼 용기까지는 없을 때, 그럼에도 상실된 삶에 적응하여 제대로 살아나갈 자신도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결국 시인은 기다리며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아니, 그것은 선택이 아닐 것이다.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상처가, 모욕이 아물기를 기다리는 일밖에는 없지 않은가.
2. 기다리며 살아가기
<개여울> 김소월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히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포기가
돋아 나오고
잔물은 봄바람에 헤적일 때에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시던
그러한 약속(約束)이 있었겠지요
날마다 개여울에
나와 앉아서
하염없이 무엇을 생각합니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노라심은
굳이 잊지 말라는 부탁인지요
김소월의 시에는 기다리는 화자가 자주 나온다. 기다린다는 말이 사뭇 무기력해 보이기도 하겠으나, 사실 그들은 매우 적극적인 기다림이라고 느껴진다. <진달래꽃>에서는 꽃을 즈려밟거나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라는 저주를 걸기도 하고, 지금 소개하는 이 <개여울>의 화자처럼 정말로 당신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한껏 품은 채로 기다리기도 한다. 앞선 <너를 잃고>와 비교해보면 이 적극성이 더욱 명확해진다. <너를 잃고>의 화자는 당신이 돌아온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다만 네가 없는 삶에 적응하여 살아가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지만, 이곳의 화자는 아직까지도 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개여울>의 화자는 떠난 이에게서 아주 애매한 메시지를 하나 받아 들었는데, 이 말이 화자를 ‘하염없이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것은 떠나는 이가 마지막에 남긴 말, “가도 아주 가지는 않겠다”는 메시지이다.
떠나는 사람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남겼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그 사람 역시도 떠나는 일이 쉽지는 않았기에 무슨 말이라도 남기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볼 뿐이다. 해석은 오롯이 남겨진 사람의 몫이다. 그렇다면 화자는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지금은 가도,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는 것이다. 아마 개여울에 앉아 하염없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이는 떠나는 이의 말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었으리라 짐작한다. 돌아오는 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여간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를 들여다보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에 석연찮은 부분이 있다. 기다리는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다면 무엇하러 개여울엔 나와서, 왜 그렇게 그 말을 곱씹어 보는가. 그저 집에서 편안히 믿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모르긴 몰라도 화자는 아마 그 말의 다른 의미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가도 아주 가지는 않을 것이다”를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예컨대, 그것이 ‘몸은 떠나겠지만, 마음의 일부분은 남겨 놓겠다’는 의미라면 어떨까. 기다리는 이를 괴롭히는 것은 이 두번째 해석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떠나는 이가 후자의 뜻으로 이야기했다면, 아마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돌아오지 않을 것이니 마음이라도 조금 남겨놓고 간 것일 테니까. 그리고 짐작컨대 아마 이 뜻을 개여울의 그 사람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말의 해석이 아니라, 그 말 뒤 발화자의 감정을 궁금해 한다. 그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곰곰이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화자가 낸 결론은 그것이다. ‘굳이 잊지 말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는 잊지 않고, 하염없이 생각하고 기다린다. 사실은 그 기다림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3. 결국엔 잃어야 하므로
작년에 나는 사랑니를 뺐다. 처음 병원에 갔을 때 의사 선생님은 사랑니가 썩어서, 나중에는 빼기가 더 어려워지므로 지금 처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랑니를 빼기 위해서는 두 번이나 나눠서 빼야하고, 중간 중간 실밥도 풀러 몇 번이나 병원을 왔다갔다 해야했다. 귀찮아서 괜시리 짜증이 남과 동시에, 도대체 사랑니는 언제부터 입안에 생겨났던 걸까하고, 또 ‘어차피 없어져야 할 거면서 뭣하러 생겨난 거야’하고 불평하기도 했다. 그래도 짜증이 조금 가라앉자 없어지기 위해 태어난 사랑니 팔자도 기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라고 왜 어금니나 송곳니처럼 바른 자리에 나서, 제 역할을 하며 한 평생을 그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고보면 많은 것들이(사실 거의 모든 것이) 결국엔 잃어버릴 의도를 내재한 채 태어나는 듯하다. 빨래를 할 때면 거의 매번 양말 한 짝을 잃어버리고, 볼펜은 늘 있다가도 없어지고, 가끔은 분명 사두었던 책인데 책장을 뒤져보면 보이지 않기도 한다. 마치 사라지기 위해 잠깐 세상에 나온 것처럼 없어지는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만 잃으면 좋으련만, 가슴 아프게도 가끔은 더 크고 소중한 것들도 잃어버리곤 한다. 나는 어린 시절 받았던 편지를 잃어버렸고, 몇몇 좋았던 추억들도 이제는 가물가물한 것이 많으며, 좋아했던 사람도 더러 잃었다. 작년에는 좋아했던 외할머니도 돌아가셨다.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쓸모가 없는 것이든, 소중한 것이든, 또는 내가 노력하든 그렇지 않든, 언젠가는 모두 잃어버리기 마련임을.
그러니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로 잃어버리는 것을 연습하는 과정이다. 다만, 저 시들이 눈물겹게 느껴지는 것은 그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시에서는 그렇게 고통을 겪으며 잃어버림을 체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뭔가 이별을 극복하는 방법이나 혹은 힌트라도 알려준다면 좋으련만, 우리가 여기에서 목도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너무 많은 고통을 겪다보니 그것이 굳은살처럼 배어버린 사람들 뿐이다. <너를 잃고>의 화자처럼 네가 돌아올 것을 조금은 단념하든지, <개여울>의 화자처럼 그저 미련스레 기다리든지 간에 모두 저마다의 방법으로 고통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극복하는 방법은 없는 걸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잃어버림이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그 이전에는 분명 더할나위 없이 행복한 순간들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그 때문에 그렇게 괴로운 것일테니까) 이별로 인해 아프지 않으려면, 애초에 행복한 순간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겠다.
반대로 말해서 그런 행복한 순간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한다면, 이에 따르는 고통마저도 우리는(정말 싫지만) 받아들여야만 한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슬프게도 잃어버린 고통을 극복하는 방법이 아니라 단지 잃어버리는 것에 익숙해지는 수밖에는 없어 보인다. 시 속 화자들이 그랬듯이.
끝으로,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당신이 돌아오기를 포기해버린 듯한 <너를 잃고>의 김수영은 이후 아내가 돌아와서 꽤 오랫동안 잘 지냈고, <개여울>의 소월은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을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를 쓴 후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는 점이다. 세상 일이란 정말 알 수 없는 법이다. 나의 경우 사랑니가 빠진 자리에는 어느새 새 살이 완전히 차올랐다. 이제는 사랑니가 있던 자리가 어디였는지도 잘 기억이 안날 정도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세상엔 사랑니보다 큰 것들이 너무도 많아서(아마 대부분이) 아무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언젠가 아물기는 하는 것인지 모른다는 것이다.